제  목 : 

엘리야 이야기

글쓴이 :  구름처럼님이 2004-03-14 14:25:19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325)
    이 게시글이 좋아요 싫어요
 

엘리야 이야기

엘리야는 ‘길르앗에 사는 티스베 사람’(1열왕 17,1)으로만 알려져 있다. 티스베말고는 그의 출신을 알 수 있는 아무런 단서도 없다.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의 고향인 길르앗도 요르단강 동부의 소외된 지역에 있었다. 하늘에서 뚝떨어진 것처럼 홀연히 나타나서 불같이 열정적으로 살다가 불마차를 타고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Giuseppe Angeli, Elijah Taken Up in a Chariot of Fire, c. 1740/1755, oil on canvas, 174.6 x 264.8 cm, Samuel H. Kress Collection
엘리야의 승천과 그의 뒤를 이은 엘리사 (2열왕 2,1-11)


그는 전혀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엘리야는 야훼와 바알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음을, 따라서 야훼 신앙과 바알 숭배의 혼합주의를 결코 허용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히브리어로 ‘나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라는 엘리야의 이름 뜻이 이를 잘 말해준다.

열왕기 1권 17-18장은 가뭄과 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엘리야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 즉 고대 중동의 기우제 의식을 둘러싼 이야기 또는 서로 다른 제의들 간의 갈등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제로 하고 있으나, ‘누가 참 신이냐?’즉 ‘바알이 참 신이야, 야훼가 참 신이냐?’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17장에는 세 가지 기적이 소개된다. 이 세 기적의 메시지는 한결같다. 삶과 죽음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이는 바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첫번째 기적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까마귀를 시켜 당신께 충실한 예언자를 먹여 살리신다(17, 3-4).


Giovanni Girolamo Savoldo Brescian, Elijah Fed by the Raven, c. 1510, oil on panel transferred to canvas, 168 x 135.6 cm , Samuel H. Kress Collection


두번째 기적 이야기에서는 바알 숭배의 중심지 시돈(16, 31) 근처의 마을 사렙다에 사는 과부로 하여금 엘리야에게 먹을 거리를 챙겨주게 하신다(17, 9). 바알을 숭배하는 아합의 권력 구조에서 소외된 가난한 여인이 장차 바알을 거슬러 싸울 야훼의 전사에게 음식을 제공한다.


STROZZI, Bernardo , Prophet Elijah and the Widow of Sarepta, 1630s, Oil on canvas, 106 x 138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세번째 기적 이야기에서는 죽음과 삶이 더욱 첨예하게 대립된다. 이번에는 예언자 자신이 하느님의 생명력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어 과부의 죽은 아들을 되살린다. 엘리야가 당시의 치유 예식에 따라 자기 몸을 아이의 주검 위에 세 번 포갠 다음, 주님께 “오, 야훼 나의 하느님, 제가 당신께 기도합니다. 이 아이의 몸에 다시 생명의 호흡이 돌아오게 해주십시오”(17, 21)하고 간청하자, 주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어 목숨이 그 아이 안으로 돌아오게 하셨다. 세 번의 기적에서 하느님은 까마귀, 가난한 과부, 예언자 등 누구를 중개자로 이용하시든 모두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효력을 발생하신다. 자기 아들을 죽게 하였다고 엘리야를 비난하던 과부는 마침내 이렇게 선언한다.

"어른께서는 과연 하느님의 사람이십니다. 어른께서 전하신 야훼의 말씀도 참이심을 이제 알았습니다.”(17, 24)

하느님과 그 분이 파견하신 예언자는 이렇게 바알의 땅에서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였다. 기근과 죽음 한복판에서 생명을 살리려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는 어떠한 세력도, 심지어 바알 숭배를 통한 이스라엘의 반역조차도 꺾을 수 없다.



Brown, Ford Madox, Elijah Restoring the Widow's Son, c. 1864, Oil on canvas, 37 x 24 1/8 in,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누가 참 신이냐? (1열왕 17-18)


아합의 대적자
예언자 엘리야의 출현은 아합 왕조의 종교 정책에 대한 비판 세력의 출현을 의미했다. 왜 엘리야의 등장이 곧 아합의 원수의 등장을 의미하는가?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는 이스라엘 왕이 된 후 12년 동안 통치하면서 사마리아 성 건축(1열왕 16,24)하고 시돈 왕 에드바알의 딸 이세벨을 며느리로 맞음으로써 시돈 왕실과 동맹을 맺음(1열왕 16,31)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국제적 지위를 튼튼히 하고 다윗 이래 최대의 왕조 번영을 이룩한 정치적으로 매우 유능한 왕이었다.

그러나 역사가는 그의 정치적 업적을 간단하게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1열왕 16,23-28), 12년에 걸친 위대한 치세조차도 “어떤 선왕들보다도 휠씬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1열왕 16,25)라고만 평가해 버렸다. 이는 그의 후계자 아합 왕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하기 위한 전단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자신의 이러한 역사 평가 이유를 “그는 시돈 왕 에드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알에게 가서 그를 숭배하기까지 하였다.”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1열왕 16,30-33). 엘리야가 아합의 대적자가 된 정치적, 종교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사벨이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어‘국제적 긴장완화’에 기여했다는 그 자체는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고, 문제는 바알이 이스라엘 진출을 의미하였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아합과 이세벨의 결혼은 “어느 선왕보다도 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1열왕 16,30) 일이었다. 아합을 향한 예언자 엘리야의 도전은 근본적으로는 아합보다는 이세벨에 대한 도전이자 이스라엘과 바알주의와의 타협에 대한 도전이었다.


가르멜산 위에서의 대결
엘리야가 처음으로 개시한 행동은 야훼의 이름으로 가뭄을 선포한다(1열왕 17,1). 급기야는 왕 스스로가 물을 찾아 나설 정도로 극심한 가뭄이 이어진 3 년째의 이 시점에서 엘리야는 이미 쫓길 만큼 쫓겨 다녔으며 이제 야훼 예언자는 홀로 자신만이 남았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엘리야를 만난 아합왕은 ‘그대가 이스라엘을 망치는 장본인인가?’(1열왕 18,17)하면서 그는 이 가뭄이 지각없이 뱉은 엘리야의 예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엘리야는 왕이 가나안의 ‘바알’을 섬긴 정책 때문이라고 말하며(1열왕 18,18) 풍산을 관장하는 분은 야훼이지 바알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아합왕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엘리야가 갈멜산의 무너진 야훼 제단 앞에서 수 백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적대적인 왕 앞에 스스로 서 있다. 오랜 가뭄에 지치고 절망한 백성들도 결코 그 가뭄의 전언자인 엘리야에게 우호적일 수는 없다. 대적자 바알 선지자들은 수 백명에 이르고 야훼 앞의 엘리야는 오직 홀로 서 있다. 엘리야는 이제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싸움의 끝에 서 있다. 그리고 그가 백성에게 일갈한 것은 '야훼와 바알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 이다.

왜 '야훼를 선택하라'가 아닐까? 바알 숭배를 강요당하며 말 그대로 바알교 시대라고 할만한 아합 시대를 살고 있는 백성들은 그러나 심정적으로는 야훼를 배반하지 않았다고 믿고 있을 수 있다. 이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릎 쓰고 바알을 거부하지도 못하며 조상의 하느님 야훼로부터 등을 돌리지도 못한다. 적당히 어느 선에서 타협하고 정당화하며 불안과 기만으로 이 시대를 지나보려 하고 있다. 3 년의 가뭄은 이들의 신앙적 결핍의 상황과 나란히 놓여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을 이미 내건 싸움의 끝에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도 신앙에 목숨을 걸라고 외치고 있다. 타는 듯한 가뭄 속에서 생명이 바싹바싹 말라가고 있는 삶.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메마른 좌절의 나날들. 불안과 자기기만 속에서 우왕좌왕이고 있는 짓을 이제 끝내야 한다. 야훼와 바알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갈멜산에서 한바탕 쇼가 벌어진다. 구약에서 유일하게 다른 신에 대한 제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는 장면이다. 수 백명의 바알 예언자들이 하루 종일 필사적으로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부르짖고 춤추고 자해하고 미쳐 날뛰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다. 엘리야는 무너진 야훼의 제단을 고쳐 쌓고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판다. 제단과 제물 위에 네 통의 물을 세 번씩 부어 도랑까지 넘쳐나게 적신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조용히’ 기도한다.

"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이제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제가 한 모든 일이 당신의 말씀을 좇아 한 것임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  응답해 주십시오. 야훼여,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백성으로 하여금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신 분이 당신이심을 알게 해 주십시오(1열왕18,36-37)."

주의 불이 제물과 제단, 흙조차 태워버리고 도랑에 넘치는 물을 순식간에 말려버렸다. 이보다 효과적인 승리의 장면은 연출되기 어려울 것이다. 온 백성이 엎드려 야훼가 하느님이심을 한 소리로 외쳤고, 곧바로 바알 예언자들을 잡아 모두 죽여버림으로써 대단원은 피비린내로 마무리되었다. 설화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보다 야훼께서 예언자를 통해 역사 안에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사건을 반영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예언자의 신앙에 의해 해설된 이스라엘 역사의 위기를 보게 된다.


무엇이 참 종교냐(1열왕 19장)


엘리야는 전날 있었던 가르멜 산의 승리가 그렇게 결정적인 것은 못되었다. 몇 년 후의 상황을 보면 바알 성전을 완전히 채울 만큼 바알 숭배자들은 여전히 많았기 때문이다(2열왕 10,21).  또 가르멜 산의 승리가 싸움의 종지부르 찍은 것은 아니었다. 이세벨이 여전히 권세를 쥐고 있어 강력한 재도전을 받는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이번에는 내가 너를 내일 이맘때까지 반드시 죽이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천벌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내가 받으리라.(19,2)"

엘리야는 생명의 위협를 느껴 아합과 이세벨의 영토에서 도망하여 남부 유대의 브엘세바까지 갔다가 거기서 혼자 하룻길을 걸은 후 더 이상 가지 못하고 기진하여 주저앉는다. 싸리나무 아래 앉아서 "오, 야훼여, 이제 다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것 없는 못난 놈입니다.(19,4)" 라고 외친다. 이것은 좌절과 피로에 지친 인간의 모습이다. 이세벨의 권세가 떨치고 있는데 어떻게 야훼께서 진정한 주님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가 그토록 온 정열을 기울여 일으킨 야훼 종교가 이세벨의 도전 앞에서 이토록 무력해진다면 이 종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러나 다음 기적이야기(19,5-8)는 이 암울한 시간에도 야훼께서 그를 버리지 않고, 하느님의 주권을 보다 새롭고 깊이 깨닫도록 긴 여행을 하는데 필요한 힘을 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ESCALANTE, Juan Antonio, An Angel Awakens the Prophet Elijah, 1667, Oil on canvas, Staatliche Museen, Berlin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그 때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 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머리맡에, 불에 달군 돌에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음식을 먹고 또 물도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누워 잠이 들었다. 야훼의 천사가 다시 와서 그를 흔들어 깨우면서 "갈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9,5-8)

엘리야는 ‘밤낮으로 사십일(긴 세월을 가리키는 숫자)’을 걸어 계약의 성산인 호렙(시나이)에 도착한다. 엘리야가 밤을 지낸 동굴은 야훼께서 당신 영광을 내보이기 위해 ‘지나갈 때’ 모세가 몸을 숨긴 바위굴을 연상시킨다(출애 33,18-34).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행동은 쫓기는 자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좌절과 불안 그리고 아무런 대책이 없는 절망의 그 순간에 ‘야훼의 말씀’이 들려온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또한 성산에서 야훼께서 계시를 내릴 때 일어났던 전통적인 현상(출애 19)이었던 지진과 바람과 불이 엘리야 이야기에서도 뒤따른다.


말씀의 종교, ‘조용하고 여린 음성’의 종교
이와 같이 전체 이야기는 엘리야가 전통적인 이스라엘 신앙의 원천에서 갱신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신현(神顯)과 정반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즉 야훼께서는 바람과 지진과 불 속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폭풍이 가라앉고 난 뒤에 나타났다고 한다. 따라서 야훼께서는 바알(폭풍과 풍산의 하늘 신)과는 달리 폭풍의 주인이었으며 결코 자연신이 아니다. 이 계시의 과정은 매우 극적이고 대비적이다. 계시의 전 과정에서 야훼는 단지 ‘지나가고만’ 계신다. 눈에 보이는 것은 크고 강한 바람, 지진과 불뿐이었다. 더욱이 이런 가시적 현상들 속에 야훼는 전혀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야훼가 없는 현상’이 지나간 다음에 엘리야의 귀에 들린 것은 단지 ‘조용하고 여린 음성’뿐이었다.

사실 야훼 하느님은 우리 눈에 포착되지 않는 분이시다. 모세가 하느님과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면서도(출애 24,10-11) 그분의 뒷모습은 볼 수 있었으나 그분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출애 33,23)고 한 것도 바로 이 사실을 가르키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오히려 야훼 종교가 참 종교이며 모든 우상 종교와 구별되는 점이라 하겠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지 창조의 대상은 아니며, 그 어떤 창조물과도 일치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종교가 신을 형상화하는 것을 제2계명으로 금지한 것도 바로 구약 종교가 우상 종교로 떨어질 위험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여린 음성’을 통하여 야훼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신다. 이 음성이 ‘말씀’을 가리킨다. 즉 신의 ‘음성’을 가나안 종교에서는 ‘천둥’으로 이해하였으나, 구약의 종교에서는 철저히 ‘말씀’을 가리켰다. 결국 야훼 종교는 ‘말씀’ 안에서만 그 ‘계시’가 발견되는 ‘말씀의 종교’라는 말이 된다. 크고 강한 바람의 운동, 지진이나 불 같은 신비한 자연 현상은 계시의 전조는 될 수 있어도 계시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조용하고 여린 소리라면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인데, 말씀은 경청하지 않고 계시의 전조들만 보려는 것은 계시의 본질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엘리야는 여기서 바람, 지진, 불과 같은 자연 현상에 의존하여 그것을 가지고 백성을 현혹하는 바알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고, 조용하고 여린 음성 속에서 말씀하시는 야훼의 말씀을 ‘듣고’그것을 ‘실천하는’ 종교가 참 종교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사회변혁을 촉구하고 실현시키는 종교
그러나 우리는 ‘조용하고 여린 음성’이 지시하는 그 말씀의 내용을 확인하고는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실로 엄청난 사회 변혁을 요구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벤하닷이 아직 왕으로 있는 다마스커스성에 들어 가서 그의 신하인 하자엘을 왕으로 세우고, 아합이 아직도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에서 예후를 왕으로 세우라는 것, 그리고 엘리야가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데 엘리사를 그의 후계자로 세우라는 것은 분명 사회 개혁을 충동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 말씀은 관습에 따라 읽는 문장으로 머물러 있는 성격의 것이 결코 아니다. 그곳은 우리 사회를 새롭게 하는 변혁, 변화, 회개를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바알 종교와 같은 형식주의적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계시의 마지막 말(18)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의 ‘남은 자’가 이러한 사회 변혁을 주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남은 자’라는 말은 고난받는 무리를 두고 한 말이다. 특히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무리를 두고 한 말이다. 말하자면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무리를 두고 한 말이다. 말하자면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자들이 착실하게 ‘말씀에 기초한’ 사회 변혁을 해 가는 것이 말씀의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라는 말이다. 성서는 오직 이 길, 즉 고난받는 자들을 통한 사회 변혁의 길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실현된다고 믿었다.



출처 - 거룩한 독서 정태현
          생활성서간 오경, 역사서

  

카카오스토리에서 공유하기 페이스북에서 공유하기 트위터에서 공유하기 구글+에서 공유하기 Blogger에서 공유하기 (싸이)C공감에서 공유하기


   
  댓글 쓰기

 
로그인 하셔야 댓글쓰기가 가능합니다. 여기를 눌러 로그인하세요.
 

이전 글 글쓰기  목록보기 다음 글

본 게시물에 대한 . . . [   불량글 신고 및 관리자 조치 요청   |   저작권자의 조치요청   ]
마리아사랑넷 | 이용약관 | 개인정보보호정책 | 메일추출방지정책 | 사용안내 | FAQ | 질문과 답변 | 관리자 연락 | 이메일 연락
Copyright (c) 2000~2017 mariasarang.net , All rights reserved.
가톨릭 가족공간 - 마리아사랑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