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솔로몬의 재판

글쓴이 :  구름처럼님이 2004-02-17 00:08:25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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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SSIN, Nicolas, The Judgment of Solomon, 1649, Oil on canvas, 101 x 150 cm, Musée du Louvre, Paris


솔로몬의 재판 (1열왕 3: 25-28)

그런데 창녀 둘이 왕에게 나와 섰다.  그 가운데 한 여자가 말을 꺼냈다. "임금님, 이 여자와 저는 한 집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를 낳을 때에 이 여자도 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해산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이 여자도 아이를 낳았습니다. 집에는 우리 둘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이 여자는 자기의 아들을 깔아 뭉개어 죽였습니다.   20그리고 나서 이 여자는 한밤중에 일어나 이 계집종이 잠자는 사이에 제 곁에 있던 제 아들을 가져가 버렸습니다. 제 아들을 가져다 자기 품에 두고 죽은 자기 아들을 제 품에 놓고 간 것입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 젖을 먹이려다 보니 아이는 죽어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서야 그 아이가 제 몸에서 낳은 아이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느냐? 산 아이는 내 아이이고 죽은 아이가 네 아이야" 하고 우겼다. 첫번째 여자도 "천만에! 죽은 아이가 네 아이이고 산 아이는 내 아이야" 하고 우겼다. 그렇게 그들은 왕 앞에서  그 때 왕이 입을 열었다. "한 사람은 '산 이 아이가 내 아들이고 네 아들은 죽었다' 하고 또 한 사람은 '아니다. 네 아들은 죽었고 내 아들이 산 아이다' 라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왕은 칼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왕 앞으로 칼을 내오자  왕은 명령을 내렸다. "그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   그러자 산 아이의 어머니는 제 자식을 생각하여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여 왕에게 아뢰었다. "임금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시고 아이를 죽이지만은 마십시오." 그러나 다른 여자는 "어차피 내 아이도 네 아이도 아니니 나주어 갖자" 고 하였다.   그러자 왕의 분부가 떨어졌다. "산 아이를 죽이지 말고 처음 여자에게 내주어라. 그가 참 어머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이 판결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왕에게 하느님의 슬기가 있어 정의를 베푼다는 것을 알고는 모두들 왕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열왕 3: 25-28)


본문은 저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다.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 부르는 극명한 증거 중의 한 예화이다. 두 창기의 자기 아들 공방... 최근에 어느 유명 방송인의 아이에 대한 친부 확인 소동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결국 현대의 첨단 과학 지혜인 '유전자 감식'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만약 이 솔로몬의 법정도 현대로 옮겨 놓는다면 앞서의 방식이 동원되었을는지 모른다. 가장 신뢰할 수 있고 오차가 거의 없다시피 한 정확도로 인하여 누구도 그 감식 결과는 승복할 수 밖에 없으며, 재판에서도 절대적 증거로 채택된다. 이는 이 과학적 지혜가 지닌 합리적 결과를 공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검사를 받고, 더구나 어린 자식에게 이를 적용시킨 부모의 마음은 어딘지 모를 상실감, 모멸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모르긴 해도 거기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나 인간성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상징되는 지혜는 '구약성경'을 대표하는 지혜와 명철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대의 우리가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과학적 논리구조도 없고 정밀한 증거 시스템도 없다. 오히려 비현실인 조건제시이며 일종의 억지가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 꼭 한 가지 수반되어 있는 일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 그 중에서도 모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아마 진정한 모성이나, 진실된 사랑은 '소유를 포기해서라도 존재를 지키고 귀히 여기리라' 는 전제이다. 진실로 이 신뢰는 오늘의 본문에서 지켜지고 있다. 참 어미는 나의 어미됨을 포기해서라도 아들의 '살아 있음', 그 '존재'를 확보해 두고자 하는, 불붙는 마음을 보여 '친자 주장 포기 선언'을 한다. 이것은 실로 '유전자 감식'보다 더 정확한 '친자 감별'이며, 당연히 그토록 사랑에 불붙어 오른 이가 참 어미임은 재차 확인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 죽음으로써 사는 역설의 지혜이며 패러독스의 진리를 상징한다.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Christ and the Woman Taken in Adultery, 1644, Oil on wood, 83,8 x 65,4 cm, National Gallery, London


이렇듯 솔로몬의 재판이 구약의 대표적 지혜라면, 우리는 예수에게서 같은 지혜를 발견한다. 요한복음 8장 7절의 말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간음한 여인에 대한 정죄의 율법과 죄 지은 인간에 대한 용서와 사랑의 기로에서 예수께서는 역시 인간 양심과 사랑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고 단 하나의 센텐스로 지혜로운 명령을 내린다. 그 여인을 정죄하고자 한 자들, 그리스도를 시험하고자 한 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 둘 흩어지고 오직 죄지은 여인과 그리스도만이 남은 드넓은 성전 뜰에서 그 분은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요한 8. 11)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평결이야 말로 솔로몬의 재판을 능가하는 소중한 지혜로서, 죄지은 여인의 곤경과 또한 시험하는 자들로부터 자신 스스로를 구해내는 지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어김없이 인간에 대한 근본적 신뢰, 더 나아가 비록 모두 죄짓고 불완전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양심 속에서 가책으로 자리하는 '희망 기능'에 근거를 두었음이다. 최근 가시 돗힌 조크로서, 양심에 문제가 있어 보이거나 위선적 처신을 하는 이에게 "너는 아마 주께서 죄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 하셨을 때, 모두 흩어져 사라졌는데, 오직 홀로 남아 돌 들어 칠 위인이 한 사람 있었다면 그게 바로 그대였을 거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이는 깊이 살피면, 인간성에 대한 최후의 신뢰가 무너지는 세태의 허무를 냉소하는 비유로 보인다.
  
이상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성서적 지혜의 대표적 체계를 다시 되뇌는 까닭은 혹 우리가 추구하는 지혜가, 학문적 체계로서의 '신학' 까지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저버린 것에 함몰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경각심을 돋우고자 함이다. 과연 사랑이 빠진 지혜가 참 지혜이며, 인간에 대한 긍휼과 신뢰가 사라진 학문이 무슨 의의가 있을까. 우리 하느님께서는 어떤 지혜자들과 어떤 지혜의 패러다임으로 영광을 받으실지 묵묵히 성찰할 필요를 말하고자 함이다.

서 정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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