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영원을 건드린 삶

글쓴이 :  구름처럼님이 2004-01-04 10:42:00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118)
첨부파일1 :   렘브란트%20-%20돌아온%20탕자.jpg (66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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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1667년, 캔버스에 유화, 에르미타슈 박물관, 샹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등이 굽고 눈마저 보이지 않는 아버지는 수년 전 제 몫의 유산을 챙겨 집 나간 작은 아들을 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아들은 짐승의 우리 밖에 갈 곳이 없어지자 이제야 아버지 집을 떠올리고 마음과 발길을 돌립니다.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지팡이마저 집을 사이 없이 달려가 아들을 끌어 앉습니다. 남루한 옷차림과 끈 떨어진 신발이 지칠 때로 지친 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줍니다. 죄수처럼 삭발한 머리가 그의 회개를 뒤 춤에 찬 작은칼이 그의 결단을 암시합니다.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손에 주목하면 오른 손은 길고 섬세한 어머니의 손이며 왼손은 마디가 굵은 아버지의 손입니다. 즉 화가는 아버지를 통해 하느님께서 지니신 부성과 모성을 함께 그리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시선을 오른편으로 옮기면 아버지와 수염조차 닮았으며 비슷한 붉은 색 겉옷을 두르고 있는 큰아들이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두 사람의 포옹을 묵묵히 지켜봅니다.

빛은 이 세 父子에게 조명되었고 한 인간의 역사적인 회개를 지켜보는 다른 두 인물은 어둡고 희미하게 처리되었습니다. 빛과 영혼의 화가인 렘브란트 (Rembrant van Rijn : 1606-1669)는 자신이 죽기 2년 전에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한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고단한 일생을 살았습니다. 노 화가의 모든 예술적 역량이 완성의 경지에 이른 이 작품은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의 폭격을 피해 우랄산맥 너머의 소금창고에 4년 동안이나 보관될 만큼 인류가 보물로 여기는 작품입니다. 주인공인 세 인물의 비가시적인 영혼이 가시적인 색과 형태를 통하여 화면에서 베어 나온다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아름다움입니다.


묵상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고 계신다. 언제 어느 때고 하느님 눈에 잘 띌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아라. 그분은 우리처럼 수선스럽게 인간을 찾아 나서지는 않지만 “찾으라. 찾을 것이다”라는 원칙에 따라 우리를 찾으신다. 그분은 찾는 자만이 찾을 수 있고, 그분은 당신을 찾는 우리의 눈을 통해서만 당신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분은 내가 찾을 때 비로소 느낄 수 있고,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찾아지는 분이다.

성서에서 잃었던 둘째 아들의 비유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 둘째 아들이 실컷 먹고 마시며 가진 돈을 다 탕진할 때까지만 해도 하느님은 그의 인생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처음 유산을 제것인 양 받아낼 때 잠시 나타낼 때 잠시 나타났다가 그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청년의 삶에는 하느님이 나타날 틈이 없다. 그는 지금 하느님 없이 – 어쩌면 하느님이 없으니까 더 자유스럽게 –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때 하느님께서 그에게 찾아가 “애야, 너 왜 그렇게 사니? 그렇게 살아서 되겠니?”하고 충고하면서 방탕한 삶을 질책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들은 타락을 피할 수 있었을까? 하느님은 위대한 교육자이시다. 그분은 인간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안다. 자기를 찾지 않는 인간에게 느닷없이 다가서며 하는 충고를 인간이 오히려 인생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군소리로 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은근히 간섭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막상 그런 충고 앞에서 인간은 너나 없이 귀찮아하며 귀를 막아버린다는 것을 잘 안다.

아들은 재물도 친구도 가진 것을 모두 잃고서야 비로서 정신을 차리게 된다. 후회 속에 새로운 삶을 결심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아버지이다. 그는 드디어 아버지를 찾게 된다.

“그제서야 제 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 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 주십시오’”(루가 15,17-19).

아버지를 찾는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서 자기를 찾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아들의 마음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20).

아들을 떠나 보낸 아버지의 마음 또한 한시도 편할 리 없었고, 늘 조바심 속에서 아들의 마음과 함께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묵묵함 가운데 신뢰하는 마음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를 하루도 빼지 않고 기다리신다. 누가 아버지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랴! 그 기다림에서 우리는 우리를 찾는 아버지의 모습을 극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겨우 동구 밖에까지만 나가서 아들을 기다리신다. 철저히 인간이 당신에게로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이리하여 ‘기다림’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으시는 방식이 된다.

우리가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이 만나 주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이 만남을 체험할 때 우리의 삶에는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있습니다”(루가 11,20). 하지만 우리는 이를 느끼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이미 왔다고 하는데 그 나라가 도무지 잘 느껴지지가 않는다. 의심이 일 때가 있다. 그래서 찾기를 포기하고 이 지상의 삶이 끝난 이후로 미루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찾으심을 강조하신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 두고 기뻐하며 돌아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 또 하늘 나라는 어떤 장사꾼이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것에 비길 수 있다. 그는 값진 진주를 하나 발견하면 돌아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 (마태 13,44-46).

찾는 자만이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찾아 이미 자기 마음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느끼고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 있을 것이다. 영원을 건드린 삶, 부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의 눈에 띄는 날 우리의 삶은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출처; 이제민 신부 - 성서와 함께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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