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모세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억울함?

글쓴이 :  아메림노스 클라라님이 2020-12-17 20:42:44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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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의 억울함?

 

저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였던 것에서도 너무나 맘 아팠고, 아쉬웠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세례자 요한의 마지막 죽음의 사건이 도저히 이해를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왜???? 죽음을 맞이하는 모양새는 수만 가지일 것인데, 하필이면 그 나쁜 여자의 부탁으로 딸이 춤 한 번 추어 주었다고 ... 체면 ... 등 들을 운운하면서 ... 그런 말도 안 되는 하찮고 값없는 죽음을 맞이했어야 했었는지요?

+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저도 사실 처음에는 하느님의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느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도록 고생하고 애썼는데 왜 약속의 땅으로 들여보내시지 않고 먼 발치에서 구경만 시켜주시고 죽음을 맞도록 허락하셨을까? 너무 인색하신 거 아니냐는 항변이 일어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이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왜 제가 처음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렇게 아쉬운 죽음을 맞은 것에 대해서 억울하다고 느꼈었는지를 제 삶의 모습 안에서 성찰해 보았습니다. 사실 저도 지금까지도 가장 아닌 가장의 위치에서 죽도록(?) 삶의 현장에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애쓰고 있기에 그에 따른 제가 원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그동안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입성하지 못하고 죽는 부분이 억울하게 다가왔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이해가 갑니다. 제가 억울하다고 느꼈던 것은 모든 것을 다 이룬 뒤에 뭔가 내가 원하는 대로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억울한 것이지, 이미 모세는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과 함께 늘 생활했던 사람이었기에 모세는 늘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고 입성하지 못하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행복은 지금까지 늘 자신과 함께 하느님께서 일하셨던 그것이 행복이었기에 하느님과 함께 일했던 모든 순간들이 모두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모세는 비록 가나안 땅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죽음을 맞이하지만 너무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모세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했고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그 약속의 땅을 주실 것으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모세 또한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후손들이 그 약속의 땅에 입성할 수 있도록 길을 이끌어 주었던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씨앗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점을 묵상해 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씨앗을 우리가 땅에 심어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되면 그 열매는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주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섭리가 열매를 맺어 자신이 직접 먹는 것은 없더군요. 자연의 섭리 안에서 모두 모두 자신의 맺은 열매는 다 타인이 먹도록 내어주고 있더군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 안에서 모세의 죽음도 묵상하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억울한 죽음에 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억울하다고 생각하는가? 세례자 요한 본인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세례자 요한은 아마도 그렇게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비슷한 마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셨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도 이미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시면 아니되옵니다." 하고 바른 길을 가르쳐 주었으나 그러한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이 걸림돌이 되어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였으니 자나깨나 어떻게든 세례자 요한을 죽일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종교 지도자들이 늘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모의하고 궁리하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바른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죽는 죽음을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입장에서는 왜 하필이면 세례자 요한이 그런 나쁜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이 춤 한 번 춘 댓가로 그렇게 값 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는지 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도 우리의 인간적인 보상 심리가 작용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열성을 다해서 하면 그래도 뭔가 인간적으로 보기에 그럴듯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보상 심리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왜 세례자 요한이 죽음을 맞은 그 모습을 두고 값없는 죽음이라고 느끼고 있는지 또한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의 일을 하다가 맞는 죽음은 그 죽음의 형태가 어떠하든지 값없는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일꾼을 그렇게 가치 없이 보고 스스럼 없이 춤 한 판 값에 죽일 수 있는 인간의 잔인성에 우리는 더 놀라워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히려 세례자 요한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사람의 생명을, 하느님의 일꾼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살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해 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했다고,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고 그 나쁜 여자와 그 여자의 딸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지 그 부분을 볼 수 있는 것이 더 유익한 묵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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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타민안나 (2020/12/18 06:5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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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자매님~

오늘도   좋은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날씨가 무척 춥네요.
건강 조심하시고 행복한 날 되세요! (아메림노스 클라라)
  
  주님을 찬양하라모바일에서 올림 (2020/12/26 07: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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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의 입장에서 어쩜 이리 깊은 묵상을 하시는지요?
어느 사제 못지 않게
참으로 훌륭한 묵상입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늦었지만 성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좋게 봐 주시니 더 기쁩니다.
주님이 은총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아메림노스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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