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대림 제3주일/주님, 저희를 구하러 오소서/강길웅 신부

글쓴이 :  원요아킴님이 2016-12-10 06:01:33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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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마태 11,2-11)

 


받아 주소서221

대림 묵상 3주일


요한 세례자가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게 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미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에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요한 1,32-34 참조).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동안 하신 일을 전해 듣고 의심을 품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한 세례자는 메시아가 곧 오실 것이라고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강력한 심판은 아직까지 없을뿐더러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예수님의 그러한 모습이 온전히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요한 세례자를 두고 가장 위대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의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이기는 하지만, 신약의 새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한 단계 뛰어넘은 것입니다. 구약은 율법 준수에 따라 상벌을 결정하는 심판의 방식이었지만, 신약은 그 율법 안에 들어 있는 정신, 곧 사랑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벌을 받아 마땅한 이들과도 함께 지내셨습니다. 신약의 새로움은, 이렇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 주신 예수님께 의지하며,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누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 저희를 구하러 오소서


떠돌이 나그네에게 정든 고향집보다 더 아늑하게 그리운 곳도 없습니다. 고생이 많고 시련이 크면 클수록 고향은 더 간절하게 그리워집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처음 조상 때부터 계속해서 나그네 길을 걸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을 버리고 사막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뒤에 그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사백여 년의 노예생활을 했고 시나이 반도에서는 사십 년의 방랑생활을 했으며 바빌로니아에서 오십 년이 넘는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오늘 1독서는 바빌론 유배시의 이야기입니다. 기원 전 590년 경 에 유대인들은 오천 리나 멀리 떨어진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끌려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무서운 징벌이었으며, 이젠 다시 고국에 돌아갈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나라는 망할 대로 망했으며 백성들의 민족정신도 쇠퇴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사야는 포로생활에 짓눌려 있는 유대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해 폐허가 된 유다의 사막과 황무지는 기름진 땅이 될 것이며 꽃과 열매가 풍성할 것이고 겁에 질리고 고통에 찌든 백성들에게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광스럽게 고국에 돌아가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실 때에 이루어집니다. 소경은 눈을 뜨고 벙어리는 입을 열며,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뛰어다니게 됩니다. 소경에게 오직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눈을 뜨는 것입니다. 벙어리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절름발이는 정상적으로 걸어가는 것이 제일 큰 꿈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오시면 그 모든 소망이 다 이루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냐고 물어봅니다. 요한은 그때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자신은 이제 죽을 것이 뻔한데 모두가 애타게 기다렸던 메시아가 정말 예수가 맞는지 어쩐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다.", 또는 "아니다."라 는 명쾌한 대답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의 제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자기 스승에게 전하도록 일러줍니다. 그것은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뛰어다니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죽은 사람까지 살아나는 아주 굉장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와 같은 사건들을 보여 주고 들려 주셨느냐. 그것은 이사야가 이미 수백 년 전에 예고한 하느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현상의 사건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메시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옛날 예언자들이 말한, 메시아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여 주심으로써 확신케 했던 것입니다. 요한과 그 제자들은 이사야서 35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덧붙이시기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도 의심했으니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의심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예수님을 의심하며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다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그들 신앙의 모순입니다. 

우리는 지금, 메시아시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을 기다리는 것은 하느님이 직접 인간으로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은 마지막 날에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님께 대한 기다림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분이 오시는 날은, 죄로 병든 우리 모두에게 참된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해방의 날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오직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분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꿈이 있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바로 그 소망과 꿈을 채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참된 평화와 행복은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도 어떤 의미에서 불구자들입니다. 돈만 알고 세속에만 깊이 빠졌던 병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소경이요 귀머거리요 절름발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떠돌이였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제멋대로 헤맸던 방랑자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립시다. 고향 같은 하느님을 애타게 찾아 기다립시다. 


[말씀자료:-강길웅신부-편집:원 근식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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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카엘라모바일에서 올림 (2016/12/11 20:2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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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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