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이되어 사라지기엔 너무나 소중한자료
몸은 생명의 블랙박스,
신체 장기와 조직 중 환자 삶 이어줄 수 있는 기증 가능 항목 150종
첨단 의술 발달해도 神이 준 인체 못 따라가… 죽은 자가 산 자 돕는 셈
서울의 가톨릭의대 캠퍼스, 응용해부연구소가 자리한 연구동 4층에는
사후(死後)에 기증된 몸 200여구가 항시 보존돼 있다.
의학 연구에 써달라며 기증된 고귀한 몸들이다.
백혈병을 앓다가 부모와 헤어진 7살 아이의 몸도 있고,
위암으로 가족과 사별한 90세 할아버지의 몸도 있다.
묘비마다 사연이 있듯이, 다양한 몸이 있다.
이곳에서는 그런 몸으로 해부학 실습을 한다.
의료 세미나도 수시로 열린다.
새로 나온 수술 기법을 배우려는 외과·정형외과·이비인후과
의사 등이 기증된 몸을 대상으로 술기를 연마한다.
코 내시경을 이용한 축농증 수술, 복강경을 이용한 위암 수술을 익힌다.
이들의 환자는 냉동 보존된 '신선 시신(屍身)'이다.
탄력이나 감촉이 거의 살아 있는 상태의 몸으로 유지되어 있다.
혈관을 잘못 건드리면 피가 흘러나온다.
한 신경외과 교수는 뇌 깊숙한 부위의 암(癌) 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이
잡히면, 전날 이곳을 찾는다. 매번 하는 뇌수술 이지만 정확한 해부학을
다시 파악하고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면 환자의 뇌수술이
깔끔하게 끝날 확률이 당연히 높아진다.
여러 대학의 갑상선 수술 전문의들도 이곳을 찾아
목에 지나가는 신경을 이곳저곳 살펴본다.
로봇이나 내시경 수술의 등장으로 메스의 행로가 예전과 달라졌기
때문에 새로운 배움이 필요하다.
수술 때 성대 신경을 잘못 건드리면 환자가 목소리를 잃을 수도 있다.
결국 죽은 자의 몸은 산 환자를 위해 쓰인다. 의사는 매개일 뿐이다.
몸을 이용한 신(新)의료 연구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유럽에서는 국립(國立) 임상연구 센터를 운영하기도 한다.
태국은 왕립(王立) 수술실습 센터를 세웠다.
3차원 의료영상을 통한 해부학 교육 장비들이 많이 나와 있지만,
몸을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지 못한 의대생일수록 나중에 환자의 몸에
칼을 대는 외과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몸이 없다면 반쪽 의학교육이다.
현재 가톨릭의대에 시신 기증을 약속한 사람은 약 5만 명이다.
의대 교수도 있고, 그 부인도 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인도 있다.
나중에 자식들이 반대해도 반드시 기증하라고 못을 박는 경우도 있다.
미국 서부 애리조나 주의 소도시 '선 시티'(Sun City)는 고령 인구
비율이 미국 내에서 매우 높은 곳이다. 노인병 센터들이 몰려 있고,
그 중심에는 '배너'(Banner) 선 건강연구소가 있다.
이곳에서 치료받는 치매나 파킨슨병 환자들은 특이한 서약을 한다.
자신이 죽으면 즉시 부검을 하라는 내용이다. 미국 전역에서 기꺼이
이곳을 찾아와 서약한 이가 수천 명이다.
이들의 신경학적 증상과 뇌기능 장애는 일일이 기록된다.
그러고 나서 이들이 사망하면 3시간 이내 뇌 조사가 이뤄진다.
삶과 죽음의 교차점에서 치매 정복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연구 결과는 퇴행성 뇌질환 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쓰인다.
신체 장기나 인체 조직 중 기증으로 환자에게 쓰일 수 있는 항목은
150여종이다. 피부는 화상환자에게, 뼈는 잘 낫지 않는 복합 골절
환자에게, 심장 판막은 심장병 환자에게, 혈관은 수술 부위 혈관을
이어주는 브리지로 쓰인다.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그 수요의 90%를 외국에서 수입해 쓰고 있다.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하느님이 준 신체와 장기를 따라가지 못한다.
인공 간이 개발돼 있다지만, 장기이식으로 들어온 간의 반의반도 흉내
내지 못 한다. 간경화로 골골대던 환자가 간 이식 후 히말라야 등반에
나서기도 한다.
만성 신부전증 환자가 신장 투석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5년 정도지만,
신장이식으로는 수십 년간 새로운 삶을 영위한다.
이처럼 우리의 몸은 위대하다. 그러기에 존귀한 인권의 가치는 몸에서
시작된다.
몸은 공공의 자산이기도 하다. 나의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적인 매혈(賣血)과 장기매매를 금지한다.
무상 기증으로만 남에게 줄 수 있고, 그러기에 가치 있는 몸이다.
인체 기증 운동을 펼치다 떠난 미국인 로버트 N 테스트씨는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라는 시(詩)를 남겼다.
"해질 때 노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나의 눈을 주십시오
(중략).
자동차 사고로 죽음을 기다리는 청년에게 나의 피를 주어 그가 먼 훗날
손자들의 재롱을 볼 수 있게 해주고(중략),
나의 뇌 세포로 듣지 못하던
소녀가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듣게 하여 주십시오(중략).
나머지 것들은 재로 만들어
들꽃들이 무성히 자라도록 바람에 뿌려 주십시오."
150송이 꽃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몸이기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게 몸이다.
그것이 평생 자신의 몸을 사랑하고 아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김 철 중 의학전문 기자·의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