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주님 수난 성지 주일/무고한 예수의 죽음에 공모한 자들/유영봉 신부

글쓴이 :  원요아킴님이 2015-03-28 06:59:56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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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 / 마르코. 14,1─15,47
                                                                    - 유 영봉 신부 -

묵상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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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니에서 졸고 있다가 도망친 제자들, 음모를 꾸미고 유다를 매수하는 지도자들, 유혹에 빠져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예수를 모른다고 거듭 부인하는 베드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주는 빌라도, 예수의 죽음은 이 모든 이들의 죄의 합작(合作)품 이다. 우리도 때로 무관심과 방관으로 이런 일에 한 몫을 하고 있다.


1.무죄한 예수의 죽음에 공모한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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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에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마르11,10)하며 환호하던 군중들이 얼마 안 가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르15,14)하며 악을 쓰는 사람들을 만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세상인심을 너무나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을 보면서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결코 그렇게 소리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는 책임이 없는가? 무죄한 예수의 죽음에 공모한 사람들은 누구들인가?

-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하였다(마태26,4) 예수의 죽음에 가장 깊이 관여한 이들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 대제관들이었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는 예수의 성전정화(마태21,12-17)때부터 더욱 구체화되었다. 예수는 그들의 기득권을 송두리째 앗아갈 위험천만한 존재였다. 그들은 은전 서른 닢으로 유다를 매수하였다.(마태26,15)

-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26,15). 이는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보며 “낭비한다.”고 비난하던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돈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청부살인이나 밀고나 배신은 손쉬운 일이다.

-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마르14,37).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있어라.”(마르14,34) 하시는 스승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다. 스승이 붙잡히자 "그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마태26,56)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가 심문을 받는 곳에까지 갔으나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지요?”(마르14,67)하는 하녀의 말에, 베드로는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마르14,71)하며 거듭 부인하였다. 믿음 때문에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겠다는 자세는 이런 무기력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며 소리 질렀다.(마르15,13) 지도자들의 충동질을 받으며 덩달아 춤을 추는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다. 세상인심은 항상 그런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가' 보다는 구호와 매스컴의 조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군중이다.

- “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었다. ”(마태27,31) 빌라도는 예수가 죄 없는 줄 알면서도, 폭동이 일어나려는 기세를 보고(마태27,24) 그리고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요한19,12) 하는 말은 빌라도를 꼼짝 못하게 하는 말이었다. “출세를 위해서는 죄 없는 사람 몇 명 죽이는 것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예수는 기득권자들의 음모와, 물욕과 시기심에 사로잡힌 유다스와, 무기력하고 어떤 신념도 없는 제자들과, 덩달아 춤을 추며 죽이라고 소리치는 군중들과, 정치적 출세욕에 포로가 된 빌라도 등, 이 모든 이들의 죄가 예수를 죽음에로 내 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지금도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고 우리도 그것들을 방관하며 묵인하는 때가 많다. 예수의 죽음, '예수 사건'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우리의 죄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2.죽음은 가장 힘 있는 말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이 제수(헤로디아)를 데리고 사는 헤로데의 부도덕한 생활을 비판하다, 살로메의 질투의 제물이 되어 죽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또한 숱한 기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한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항상 '아버지의 뜻'(마태26,42)을 따르고 찾으셨다. 그런 예수님께서 힘을 가진 이들의 질투와 음모의 희생이 되어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신다.

“저런!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더니, 십자가에서 내려와 네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마르15.30)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우리가 보고 믿게 이스라엘의 임금 메시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마르15,31-32). “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가23,39) 온갖 조롱과 모독 가운데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는 참으로 철저히 혼자된 고독을 맛보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말이 없으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15,34)

예수는 위안이 가득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따른 보람이 무엇인가? 하느님께 철저히 외면당한 것과 같은 죽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항상 죽기 전에 모든 일의 성패를 판가름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수는 참으로 십자가의 철저한 고통까지도 우리를 위해 다 바치신 분이시다. 예언자에게 있어 죽음은 그 생애 중에 가장 큰 부르짖음이다. 마르틴 루터 킹도, 간디도,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모두 비명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정의로운 사람의 억울한 죽음' 그것이 가장 큰 메시지이며, 세상을 향한 가장 큰 외침인 것이다. 우리는 혹시 생전에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위로와 평화가 가득한 가운데 죽겠다는‘욕심’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가?


편집:원근식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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