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사순 제4주일/악행에 무감각해져가는실천적 무신론자인가?/서광석 신부

글쓴이 :  원요아킴님이 2015-03-14 07:47:22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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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3,14-21)

(마르코 9,2-10)

오늘의 묵상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병행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깨닫지 못하면 하느님도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직하게 대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구차한 변명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의 입을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자신들이 인정하기 싫은 아픈 진실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남에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과장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려면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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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묵상

악행에 무감각해져가는 실천적 무신론자인가?
                                                                       -서광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게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망고농장 세 개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세 아들을 불러 망고 밭 하나씩을 맡기며 나무 한 그루에 매일 한 양동이씩 물을 주도록 이른 다음 긴 여행을 떠났다.  큰아들은 아주 합리적이어서 크고 작은 나무에 같은 양의 물을 주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뿌리 크기에 따라 물을 달리 주고자 나무를 한 그루씩 뽑아 뿌리의 길이를 쟀다. 시간이 흐르고 결국 망고 나무는 모두 죽었다.  둘째 아들은 물을 매일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여행하는 날짜와 같은 수만큼 양동이에 물을 한꺼번에 다 주고 쉬었다. 나무들은 시들어 버렸다. 막내아들은 사려 깊은 아버지를 믿고 나무에 한 동이씩 매일 물을 줬다. 아버지가 돌아 왔을 때 나무들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큰아들과 둘째 아들의 사고 논리로 생활한다. 세상의 것조차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논리로써 인간지성을 넘는 신을 증명하려 한다. 지식만으로 매사에 대처하려는 풍조가 현대의 흐름이다.

 르네 데카르트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공평하게 나눠가진 것은 건전한 판단력인 양식(良識)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라 말한다. 게다가 다른 것에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자기 어리석음을 없애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의 생과 사는 하늘의 명이요, 밤과 낮의 순환은 하늘의 진리이다. 이런 천명과 진리는 사람의 힘으로 관여할 수 없으며 만물에 통하는 자연법칙이다.  연어는 산란 후 죽음으로써 장차 태어날 새끼에게 자기 몸을 주고 살모사는 제 몸을 새끼에게 먹이로 내어준다. 인간은 더 나아가 긴 세월 동안 자식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희생을 한다. 이처럼 우주의 원리는 사랑이며 그 원천은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드러내신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다. 하느님의 첫 번째 창조에서 인간은 하느님 모상이었으나 새로운 창조에서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인간은 하느님 본성에 참여하는 자녀가 되었다(에페 4,25; 콜로 3,10; 2코린 5,17).

 본래 진리에 이르는 길이란 '눈 위에 찍힌 사슴의 발자국'과 같다. 사냥꾼이 그 흔적을 따라가 사슴을 포획하듯이 인간은 스승의 족적을 따라 피안의 문에 들어서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인류의 가장 큰 스승이시다. 비록 시대가 물질만능 풍조에 좌우되고 있어도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의 세계는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가는 행렬에 동참할 때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데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예수)밖에 없습니다."(사도 4,11-12)라고 한다.

   그리스도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넘어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지만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는 듯이 살아가는 실천적 무신론자가 늘어간다. 가정과 사회에서 자기 의견만을 관철시키려 하며 불의와 적당히 타협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못 본 체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한 실천적 무신론자가 된다.

 대중이 보는 앞에서 폭행과 추행, 납치 등 각종 범죄가 발생한다. 그 대중 속에 과연 죽음으로 인류를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었는가?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점점 더 무관심해져 가는 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신앙인인 우리가 생활 속에서 실천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 외아들을 보내시어 무로 돌아갈 피조물인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우리가 남의 불행을 보고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 주변에서 고통을 당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편집 - 원 근 식 요아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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