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4주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018.9.16
제1독서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내맡겼다.>
▥ 이사야서 50,5-9ㄴ
제2독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 야고보서 2,14-18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 마르코 8,27-35
순명이 사라지자 식별이 사라졌고 맹신과 배척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친분의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태어나서는 부모와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좀 더 나아가 친구들과
사회에 나가서 선후배 및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요즘 세대를 바라보면 관계에서 함께 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가치가 되었습니다.
저는 옳은 길을 같이 걸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함께하고 내 말에 동의해주는 사람끼리 모이는 집단이 말이죠.
함께하는 믿음과 사랑이 헷갈리는 시대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저 사랑이 나에게 식별도 없이 믿음을 주어서
어떠한 길을 걸어도 함께 해주는 것이 사랑의 관계이며 친구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하지 않는 이라며 배척하기 바쁩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적그리스도로 여기기에 딱 좋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지금 세대가 순명의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마르틴 루터를 바라보시는 시각을 보면
그에 사상에 대해 완전한 악이라는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들으려 하고 함께하려 합니다.
사실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 '구원은 믿음에 의해서 얻는다'는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하느님께 순명하여
하느님께서 보시는 시각, 하느님께서 들으시는 것들을 보고 들으며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셨고 어떻게 판단하셨는지 바라보게 되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하느님이 옳다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느님과 닮아가는 과정
이것이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보면 순명은 신앙의 가장 기본단계입니다.
정확히는 상대와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한 기본 단계가 순명입니다.
사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전에 사람과도 깊은 관계를 위해서는
자신을 잃지 않은 순명이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요즘 세대를 보면 신앙도 그렇고
이름 알고 같이 있는 것으로 친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상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그냥 옆에 있는 것만 중요시합니다.
겉모습으로 동의해주고 그냥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성당활동만 열심한 모습 보이면 신앙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불만을 말하지도 못하고 말하면 혁명을 일으키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이 행동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 행동은 순명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언가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선택에 하느님의 선택에 또한 타인의 선택에 불만이 많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불만이 참 많은 인간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타인의 행동에도 불만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과거에 제가 식별해야하는 3가지를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잊고 있는가?
상대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상대의 행동이 어떤 올가미가 되었는가? 그 모든 식별의 기반이 순명입니다.
순명이 상대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따름으로서
자신의 것이 아닌 상대의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상대가 잊은 것을 설교가 아닌
내 행동으로 어떻게 기억하게 할 것인가?
상대의 선택과 다른 선택이 어떤 결과가 되는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쇄신입니다.
타인을 짓밟고 자신이 옳은 것을 세우는 것이 혁명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따르면서 예수님께 혁명을 일으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그를 사탄이라 칭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완전히 사는 것은
듣고 보는 것이며 더 나아가 공감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공감은 역지사지로 표현되지만 순명은 역지사지의 윗 단계입니다.
여러분도 교회에 상당한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를 배척하는 혁명이 아닌
함께 나아가는 쇄신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내 옆 사람에게 혁명이 되고 있습니까?
쇄신이 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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