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018.9.8
제1독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 미카 5,1-4ㄱ
또는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뽑으신 이들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 로마서 8,28-30
복음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6.18-23
탄생도 선택받아야 하는 세대,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 축일입니다.
가장 올바르고 겸손되게 하느님의 길을 걸으셨던 인간 성모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런 성모님도 가장 약하고 작은 순간인 탄생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 탄생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삶이 있습니다.
지금 현재로서 살아가는 삶도 70억 가량이 되고
과거에 지나간 삶까지 생각하면 그 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이 많습니다.
선한 삶의 수를 세어보아도 수없이 많을 것이요.
악한 삶의 수를 세어보아도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삶은 탄생이라는 가장 작은 사람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악한 사람을 보면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 세상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악인들도 있음으로서 그들이 최소한의 지키던 것은 있었습니다.
바로 삶을 즉 어떠한 시작점은 지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아무리 악인들이라도 자기의 형제들에게 인사할 수 있고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사랑하는 자녀가 태어났음을 기뻐하고 모든 것을 해주려 했습니다.
최소한 그들이 죽도록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그들의 삶은 악했을지언정
그들이 살린 또 다른 삶은 선하기도 했고 그렇게 삶이 쌓이고 쌓이고 해서
오늘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처럼 수많은 삶이 모여
임마누엘 즉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하느님의 마음에 굉장히 안 들었던 악인들도 있고
하느님의 규정에 올바르지 않은 관계들도 있으며
왕족과 같은 영웅들도 있고 요셉과 같은 평범한 이들도 있었으며
유배 중에 모든 것을 잃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도 아니고
계획에도 없던 마리아의 임신으로 받아들여진 아이었습니다.
삶의 시작이 어떠하였든지 그 작고 초라한 삶을 시작으로 인간은 크고 원대한 일을 행합니다.
오늘 베들레헴에 내려진 축복은 모든 인간의 탄생에 대한 축복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이러한 작은 탄생들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탄생하였고
그 삶은 하느님의 계획 아래에서 움직이게 됩니다.
물론 인간들이 그 삶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도 염두 해두시며 구원계획을 만들어 갑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들은 각자의 삶들이 부딪히면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고 하는 것을 배워가며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그러한 뜻이 있고
모든 삶을 거치며 인간은 완성되어 감을 기억하라고 바오로 사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에게 불편함 혹은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로
그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하고서 그 사람을 부정합니다.
탄생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상당히 가볍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애니메이션 슈렉포에버를 보면 등장인물들은 태어난 날에 대해 가볍게 여기고
그것을 주는 조건으로 악한 마법사와 계약합니다.
태어난 날을 가벼이 여기고 악한 마법사에게 넘긴 이들은
말 그대로 그 삶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의 삶의 빈 공간은 너무나 큰 재앙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잃고서 사람은 다른 이의 삶을 부정하는 죄를 가벼이 여깁니다.
그런 생각을 갖는 것조차 큰 죄인 것입니다.
다만 과거에는 방법이 없어서 실행되지 않은 죄였고
그 죄를 지을 때 실제로 내가 피해를 보았다는 사실 안에서
현실에 느껴지는 감각을 통해 죄를 지었기에 그나마 다른 죄보다는 실천 빈도가 낮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죄를 짓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실제로 입은 피해가 아닌 허구의 불안감만으로도
사람을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많기에 안타깝습니다.
장애를 가진 것을 확인하고 이 삶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며
태어나면 이 아이나 나에게 피해가 될 것이다.
내가 이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태어나면 함께 불행해질 것이다.
혹은 실제로 그 정도도 아니고 내가 책임지기 싫다는 이유로 낙태가 자행됩니다.
자신의 잠깐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 다른 이의 삶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어린 아이들을 보호해야합니다’라는 이야기에서
이제 탄생 자체의 축복과 보호의 필요성을 선포해야한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가톨릭이 생명을 보호해야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모든 생명에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불쌍해서가 아닌 하느님께서 그것을 통해 하실 일이 있는데
그 가능성 자체를 막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생명의 탄생에는 요셉 성인께서 들으신대로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낙태에 대해서는 태아의 생명권이냐 산모의 생존권이냐 라고 이야기하며
누가 더 불쌍하고 어느 쪽 생명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이야기를 떠나서
그 아이가 어떻게 태어나든지 간에 탄생이라는 기회의 평등은
누구나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탄생이 누구나 누리던 당연한 권한이었던 시기에서
지금은 탄생도 인간의 선택을 받아야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주는 이유는
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을 끊을 자격이 누구한테 주어진 것입니까?
태어날 아기를 떠나 아무리 원수를 만났을지언정 그의 탄생은 부정하지 마십시오.
그의 삶이 악으로 끝날지라도 그 삶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일을 하실 것입니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