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말씀은 정화되어야 합니다.

글쓴이 :  바울라님 2018-09-02 06:30:58  ... 조회수(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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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2018.9.2

 

제1독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는 안 된다. 주님을 명령을 지켜야 한다.>

▥ 신명기   4,1-2.6-8

제2독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 야고보서   1,17-18.21ㄴ-22.27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   7,1-8.14-15.21-23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말씀은 정화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제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 늘 저에게 다가옵니다.

책을 읽으면 내용은 기억나는데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수덕신비신학이었는지 가르멜의 산길이었는지 어떤 성경 묵상집인지에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들리는 데로 믿으면 안 된다.

내가 들은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버려야 한다.

그 이유로 두 가지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듣는 인간의 좁은 식견과 하느님의 변심입니다.

첫째 이유의 경우 아브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자손에 대한 약속을 들었을 때 하느님의 자녀들인 교회가 아닌

자신의 자식 이사악 정도로 이해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좁은 식견과

그 식견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둘째 이유의 경우 요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멸망을 선포했지만 니네베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 했지만

그들은 회개함으로서 그들의 멸망이 지나갔습니다.

하느님께서 회개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뜻을 바꾸신 것입니다.

요나도 자애로우신 하느님께서 뜻을 바꾸실 것을 예상하였습니다.

과거로부터 참으로 자주 있었던 일이란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던, 자신이 사적 계시를 받았던 그 뜻을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거룩한데 무엇을 정화하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시는 더럽혀진 계시이고 그 말씀은 더럽혀진 말씀이고

그렇기에 우리를 멸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귀가 들었고 우리의 눈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거룩하신 하느님을 뵙고도 자신이 죽을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들은 그 죽음은 정화를 통해 지나가도록 하십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그러자 사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이사 6.5-7

 

우리가 받은 하느님의 말씀을 정화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뜻은

우리의 더럽혀진 귀와 눈

즉 하느님의 뜻이 아닌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좁은 식견을 통해 바라본

하느님의 뜻을 정화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밖에서 온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더럽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모시고 드는

나의 생각이 우리를 더럽히고 죽음으로 이끕니다.

우리의 식견은 주님의 말씀의 무언가를 부각시키고 또 무언가를 못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좁은 식견 탓으로 주님의 말씀이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것은

예로부터 금지되었던 사항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무엇을 보태서도 안 되고 빼서도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

 

주님의 말씀에서 더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에서 빠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모든 사기는 진실에서 무언가를 더하고 뺌으로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 무언가를 크게 보고 무언가를 작게 봅니다.

이는 사실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나약함입니다.

단순히 말하자면 여러분의 눈 앞에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고

그 손가락을 집중해서 바라보십시오.

손가락은 보입니다. 그러나 그 주변의 것은 뿌옇게 보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좁은 식견은 하느님의 크신 뜻 앞에서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는 다리를 만지며 전봇대 누구는 코를 만지며 호스

누구는 꼬리를 만지며 붓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장님이 코끼리임을 알게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더 만져보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묵상해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모시고 곰곰이 되새기는 것입니다.

나의 뜻이 사라지도록 그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또 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전봇대라는 이야기, 붓이라는 이야기 호스라는 이야기 등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뜻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듣는 겸손에 도달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를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영적지도를 할 때 처음의 말씀 묵상은

상당히 어리석게 묵상을 하고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묵상일지라도 계속해서 말씀을 되새기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그 묵상은 점점 하느님의 뜻에 가까워집니다.

같은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한 이나 매일같이 다가오는 복음을 묵상한 이들 중

어디서 사적계시 쫓아다니고, 성지순례를 가고,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보다

더 하느님의 뜻에 가깝게 말하는 경우도 많이 보게 됩니다.

후자의 경우 눈에 보이는 것들 내 눈의 감동 즉 더러운 것을 쫓아다니지만

말씀을 찾는 이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쫓는 이와 은사를 주신 분을 쫓는 이는 다릅니다.

빛을 쫓는 이와 빛을 내리시는 분을 쫓는 이는 다릅니다.

피조물을 쫓는 이와 그 피조물을 낳은 진리의 말씀을 쫓는 이는 다릅니다.

선행을 쫓는 이와 사랑을 쫓는 이는 다릅니다.

징계를 쫓는 이와 심판을 쫓는 이는 다릅니다.

욕망을 쫓는 이와 희망을 쫓는 이는 다릅니다.

표징에 대한 확신을 쫓는 이와 믿음을 쫓는 이는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 수많은 둘 중에 더욱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온갖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은사는 위에서 옵니다.

빛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뜻을 정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어,

우리가 당신의 피조물 가운데 이를테면 첫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쫓습니까?

보이는 것입니까? 보이는 것을 있게 한 것입니까?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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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카엘라모바일에서 올림 (2018/09/02 10: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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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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