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믿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려면 의심하십시오.

바울라님 2018-08-23 23:22 ... 조회(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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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2018.8.24

 

제1독서  <그 초석들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  21,9ㄴ-14

복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 요한  1,45-51

 


 

무조건 믿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려면 의심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의심을 많은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저는 하느님을 못 믿겠습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꾼다고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하거나

여러분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종종 이런 싸움을 보게 됩니다.

왜 날 못 믿어? 나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 말다툼을 보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이에 머뭇거립니다.

사랑하면 믿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사랑의 증거는 믿음 아닌가?

그러나 사랑과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지만 이웃을 믿으라 한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서류로 표현하면 무엇일까요? 보증입니다.

많은 어른들이 그러지만 성경에서도

이웃을 보증해준 것은 가서 빌어서라도 취소하라고 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이웃의 보증을 섰다면 네가 낯선 이의 담보를 섰다면

너는 네가 한 말에 말려들고 네가 한 말에 붙잡힌 것이다.

내 아들아, 네가 이웃의 손에 걸려든 것이니

이제 이렇게 하여 거기에서 벗어나라. 네 이웃에게 가서 엎드려 졸라 대어라.

 

요새 돌아다니는 연애 가이드를 보면

자신의 애인이 잘못된 행동을 해도 그 사람을 지지해주라고 합니다.

어떤 가게에서 애인이 진상 짓을 하면 그 행동에 동참해야 사랑하는 것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동의를 해주어야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랑과 믿음은 다른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보증을 선다는 것은 그 사람의 길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가 파멸일지라도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내가 납득이 된 것에 희망을 가지고 믿는다 말하는 것입니다.

의심 없는 믿음,

파멸에 동참하여 같이 파멸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마귀의 행동입니다.

그 행동이 파멸인가 의심하여 파멸에서 생명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심은 올바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불신자들에 대해 예수님이나 하느님은 불행하다고 이야기할까요?

믿지 않는 이들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 안의 의심이나 불신 때문이 아닌 확신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확신하고 다른 것에 귀를 막고 눈을 감는 행동이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살아가면서 나는 의심이 많다고 하는 이들은 많이 보았지만

실제로 의심이 많은 이들을 본적은 없습니다.

진정 의심이 많은 이들은 자신이 믿는 것조차 의심합니다.

그런 이들이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자신이 무신론자라며 의심이 많다는 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의심이 많은 이 나타나엘은 진정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의심이 많은 그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 그는 정말 솔직하며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의 의견은 절대로 상대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

필립보가 그를 초대할 때도 그는 있는 그대로 필립보에게 너를 못 믿겠다고 선언합니다.

그에게는 납득이 되지 않은 것은 믿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의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셨다하는데

전통적인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밑에서 자주 묵상을 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곳

말 그대로 혼자만의 공간이 무화과나무 밑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 탐구하던 사람이었고

절대 확신하지 않던 사람이란 것입니다.

 

그런 나타나엘을 보면서 사실 오늘 복음은 꽤 어려웠습니다.

 

말 그대로 이 상황은 뭘까? 싶었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믿지 않던 불신자 나타나엘이 와서 보니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는 것을 맞췄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메시아이시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봤을 수도 있죠?

건물 안에서 서로 만나서 인사한 사람이 “아 아까 입구에서 본 분이죠?”

한다고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까 보았다고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기에도

조금 앞뒤가 안 맞고 중간에 뭐가 빠진 듯한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이 둘의 관계를 처음 본 사람이 이해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은 서로 아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구약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1사무16.13

 

아버지 이사이나 형들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를 보아도 반응이 없던 사무엘은 정말 아는 사람처럼

다윗이 오자마자 일어나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또 다른 상황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입니다.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1열왕 19.19-20

 

말 그대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를 알아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쫓겠다고 합니다.

그의 부모가 보아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인물들은 갑자기 뜬금없이 깨닫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런 일이 왜 존재하느냐.

나타나엘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듯이

사무엘이 다윗을 알아보았듯이

엘리사가 엘리야를 알아보았듯이

하느님 안에 살아가며 하느님과 관계를 맺었던 이들은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봅니다.

의심이 많은 이들은 점점 하느님을 찾아가며 하느님을 신뢰하며 믿게 됩니다.

하느님에 대해 명확히 알고 납득한 믿음은 하느님을 명확히 알아볼 수 있고

그 길을 따르는 하느님의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무엇을 믿어서 보증까지 선 것입니까?

무엇을 납득한 것입니까?

불신 속에서 다른 것에 내가 배울 것이 있다는 겨자씨만한 믿음

그 믿음의 씨앗이 자라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 보다,

당신의 가르침을, 당신의 사랑을,

당신이 창조하신 생명의 소중함을 믿는 이들을 더 사랑하십니다.

그들은 의심을 통하여 하느님이라는 껍질이 아닌

하느님의 본질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함부로 믿지 마십시오. 오히려 의심하십시오. 늘 진리를 찾고 탐구하십시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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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카엘라모바일에서 올림 (2018/08/24 1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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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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