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이가 진정한 예언자입니다.

바울라님 2018-08-13 22:15 ... 조회(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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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2018.8.14

 

제1독서   <그 두루마리를 내 입에 넣어 주시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 에제키엘   2,8─3,4

복음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마태오   18,1-5.10.12-14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이가 진정한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이들이 바라는 것이죠.

희미했던 신앙생활에 보이는 목표가 생긴다는 것이 멋진 목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사적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닙니다.

일부 사적계시자 분들이 반대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시작은 달콤하니까요.

내가 하느님께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어렴풋하게라도 다가오니 말이죠.

오늘 독서에서도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힘들어지는 이유는 인생 사는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가기 때문이죠.

우리의 3대 원수 자기 자신, 세상, 마귀 이 세 종류에서 오는 유혹이

일반인의 수십 배는 늘어납니다.

내가 마귀라도 그러겠어요.

일반인 몇 명 배신하게끔 하는 것보다는 일반인을 수천 명 거느리고 있는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정말 큰 이득이죠.

그렇기에 그런 사람의 경우 일반인에게 하는 수작보다는 더 많은 수작을 걸게 됩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도 중요하지만

다스리는 자로서 나에게 다가오는 유혹들을 잘 다스려야합니다.

 

일단 마귀는 둘째 칩시다.

왜냐하면 얘네들은 무언가 보이는 실체를 가져와서 유혹을 시작하는 녀석들입니다.

다양한 엑소시스트 영화와 같이 마귀가 그 영혼에 깃들려면

그만큼 하느님께 멀리 떨어뜨려 놔야하는데

이 친구들 자체로는 유혹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이 사용하는 미끼는 자기 자신과 세상 이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로부터 오는 유혹을 잘 다스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사적계시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유혹들을 잘 다스려야 하느님의 뜻에 벗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유혹들을 다스리는 데에 가장 크게 필요한 것은 자제력입니다.

흘러가는 것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이죠.

세상의 뜻에 따라 흘러가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은 세상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다보면 하느님의 뜻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체로도 거스를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높은 때 낮출 수 있어야하고 내가 낮을 때 높아질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을 때

내 자신을 낮춰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하느님의 말씀에 경청할 수 있어야하고

내가 수세에 몰린 낮은 위치에 몰렸어도

옳은 일을 선택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의 반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다스리는 이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높일 수도 낮출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통제력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을 통해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우리보다 작은 이 앞에 서면 우리는 흐름에 따라 강해집니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에서 내 목소리를 온전히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내 목소리를 낮추고 상대의 의견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이들은

내 목소리를 닿게 하기 위해 분노를 이용합니다.

화내고 소리쳐서 상대를 나보다 낮추고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낮은 이에게만 선포하는 복음이 아닌

세상 모든 이에게 선포해야할 복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 반대의 상황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자주 이야기가 됩니다.

'양 한 마리 때문에 다른 아흔 아홉 마리가 피해 보아야하느냐' 하며

소수로서 다수에게 몰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마리의 양을 데려오려 하는데

다른 아흔 아홉 마리에게 눈치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낮추어졌을 때 높아질 수 있어야합니다.

두려워서 말을 못하거나, 그저 세상 흘러가는데로 살아야겠다 하면서 죄를 짓는 경우가

스스로 자신을 높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다른 무언가가 아닌 스스로 자신을 높일 수 있는 이들은

다른 분노를 이용하지 않고 진리를 통해 목소리를 차분히 낼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세상의 유혹은 자기통제력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입니다.

인지하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가장 많이 겪는 마귀의 유혹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 다양한 사적 계시자들이 있습니다만 그들도 겪는 마귀의 유혹이죠.

그 유혹이 무엇일까요?

세상을 거슬러 이야기해야 하는 데에서 오는 두려움? 아닙니다.

그것은 별로 큰 유혹도 아닙니다.

예언자들 자체도 이것은 유혹이라고 생각하고서 극복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피하기 힘든 유혹은 “내가 무조건 옳아야 한다.”입니다.

이 두려움에 대해서는 요나 예언자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로 가서 예언하는 것을 꺼린 가장 큰 이유는

“니네베가 두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들은 하느님 말씀이 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능성이 있을까요?

하느님의 예언이 틀릴 가능성?  많습니다.

 

우리한테 알려진 것이 틀릴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지성이든 인지든 하느님보다는 좁다는 점과 

두 번째는 하느님의 뜻이 변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손에 대한 예언이 내렸지만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이스마엘 정도로 여기고 그 다음은 이사악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게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이라고는 생각 못했죠.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도 하느님과 인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느낀 건 달달함이었지만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하느님 뜻이 바뀌는 것은

'하느님께서 종종 죄를 지었으니 멸망할 것이다' 라는 예언을 내리실 때

안 이루어지는 이유가 회개입니다.

전제와 결론이 있는데 전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하느님께서 결론을 이루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죄인이 회개했는데 멸망할 이유가 없다해서 멸망을 거두시는 것이죠.

우리의 자기통제력의 마지막 단계는 자기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많은 이들이 합니다.

그 극단적 페미니스트 등 극단이 붙은 이들은 그걸 성공한 이들입니다.

다만 자기자신은 통제 못합니다.

우리 신앙으로 치면 내가 믿는 것이 옳기 때문에

주변에서 무어라 하든 내 뜻대로 행하려합니다.

결국 내 감정대로 내 이성이 옳다는 대로만 움직이는 이입니다.

자기자신을 통제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사적 계시를 받으면 바로 이단으로 직행입니다.

사적 계시가 성덕이 뛰어난 이들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마음대로 내리시는 것이기에 그럴 가능성도 많고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사적 계시자들이 교회의 철저한 통제와 식별을 받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오상을 받은 비오 신부님도 직무정지를 받으셨고,

파티마 성모 발현 목격자인 루시아의 경우 수녀원에 입회하도록 하여

아무도 다른 이와의 만남을 최대한 통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것을 확신하지도 않고 침묵 중에 하느님을 계속 만났죠.

 

저도 많은 사적 계시자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교회의 통제와 식별을 거부하는 이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자신의 달달함과 달리 주변의 반응은 싸늘하거든요.

그 방해를 자신의 다양한 계략을 통해 이겨내느냐

혹은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느냐의 차이입니다.

자신의 불안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

온전히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이가 진정한 예언자입니다.

사적 계시자이냐 아니냐를 떠나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여기저기 휘둘리게 두지 마십시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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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카엘라모바일에서 올림 (2018/08/14 09: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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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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