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9주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2018.8.12
제1독서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다.>
▥ 열왕기 상권 19,4-8
제2독서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에페소서 4,30─5,2
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요한 6,41-51
하나를 믿으면 다른 하나는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믿는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대로 정한 것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왜곡되어 갑니다.
우리의 편의대로 마음대로 정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은 정량화된 수치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가면 믿는 것이고 세례를 받으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당에 나오면 신자요, 세례를 받으면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란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입니다.
어떤 종교적 공간에 참여한 사람도 아니고
그 종교의 예식에 참여한 이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눈에 보이도록 수치를 정하고서 우리의 왜곡이 생겨납니다.
믿음을 수치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편리하긴 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내 신앙의 수준이 숫자 몇인지 표현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게임처럼 스테이더스 창 하나 띄우면
내 힘이 몇이고 지력이 몇이고 신앙심이 몇인지 확인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불가능하기에 그런 수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치로 여기는 이들은 어리석습니다.
주일미사 나왔으니 신앙심 +1되고 주일미사 빠졌으니 신앙심 -5되고 합니까?
묵주기도하면 신앙심 +1 그렇게 수치적으로 되는 중 아십니까?
무슨 신앙이 칭찬스티커라 생각하는 것입니까?
나는 수도자니까, 나는 성직자니까, 내 가족이 그러니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신앙심이 +50 그렇게 됩니까?
봉사활동 하면 선행점수 +10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난 세례를 받았으니 가톨릭 신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우습고
그런 생각으로 나는 가톨릭신자지만 사회정의를 따르겠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으니 참으로 우습니다.
여러분 중에 고해 성사 들어가서 사제께
“형제님은 이런 이런 이런 죄를 지었으니 신앙심이 -342로 떨어졌고
선행점수가 -512점으로 떨어졌지만 고해성사로 모두 0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게임중독, 혹은 게임 시스템 같이 편한 것에 중독된 이들로서
좀 벗어날 필요가 있는 이들입니다.
믿음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누군가의 편을 든다는 개념과 비슷하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여러분이 부모인데 만약 내 자식 둘이 서로 거짓말을 했다며 싸우다가
나한테 고자질을 합니다.
이리저리 보아도 둘 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누구를 믿으시겠습니까?
한 쪽을 믿으면 다른 한 쪽은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이렇듯이 믿음은 너도 믿으면서 너도 믿어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는 버려야합니다.
가톨릭에는 3대 원수라고 제시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자신, 세상, 마귀 이 세가지입니다.
만일 이 세가지를 하느님보다 겨자씨만큼이라도 더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나는 하느님을 믿고 가톨릭 신자라고 해도
세상의 판단방식이 옳다 생각하고 세상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면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유다인들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였다.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말보다는 세상의 판단을 믿은 그들은
예수님을 거짓말쟁이로 판단하여 떠났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며 따르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결국 중요한 말씀을 할 때, 자신들과 반대될 때, 떠나고 맙니다.
하느님의 목소리가 침묵이라 경청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 대적하지 않는 이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당만 다니고 있으니 내가 밖에서 무엇을 하든
나는 하느님의 자녀이며 가톨릭 신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자신을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해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하느님의 뜻을 믿지 않고 다른 것을 믿으면서
입으로만 하느님을 믿는다 하면
그게 성직자이든 사목회장이든 아무도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이 상대적 믿음의 놀라운 기적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우도의 사례, 세상이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보다 그 예수님 자체를
“더” 믿은 그는 천국은 훔친 “성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우도는 디스마 성인으로서 시성되었습니다.
우리가 겨자씨만큼이라도 더 믿어야하는 이유를 이 성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것을 무엇을 믿어야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믿고 예수님의 행동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행동을 하셨습니까?
세상의 방식에서 가장 역겹게 본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사랑, 하느님을 이보다 잘 표현한 단어가 있습니까?
세상은 외칩니다.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외칩니다.
내가 그것을 당했기에 그렇게 갚아주는 것이 옳다고 외칩니다.
격분은 나의 것을 폭발시키며 분노는 나를 힘나게 하며
폭언은 상대를 아프게 하고 중상은 상대를 무너뜨립니다.
나의 원수를 상대하기 가장 화끈하고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그것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런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느님의 방식인 사랑을 믿어야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를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우리에게 새로운 행동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닌
하느님께서 하신 행동을 믿고 따르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무너지기 위해 하는 기도는 하느님의 행동이 아닙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억누르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은 자연스럽게 하느님께서 이루실 일이지
우리가 하느님께 앞서서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가를 치루고 온 이들을 자비로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멋대로 행동하고 하느님의 이름을 붙이는 건 나를 더 믿은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방식을 따른 것 또한 세상을 더 믿은 것이며
여러 폭력의 힘을 사랑보다 더 믿은 것은 마귀를 더 믿은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엘리야 예언자나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빵을 먹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엘리야가 어떤 빵을 먹었으며 하느님의 빵이 무엇입니까? 오늘 독서를 봅시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뜨겁게 달군 돌 위의 구운 빵과 물처럼,
우리는 다양한 겉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도, 봉사, 희생, 경청, 침묵, 심판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뜨겁게 달군 돌을 기반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이 돌은 사랑입니다.
이 뜨거운 사랑을 통하여 행해지는 것이 하느님의 빵이며
이 사랑을 무시하고 행해지는 것이 세상의 빵입니다.
형제 여러분 세상의 빵을 먹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하느님을 믿으면서 세상의 방식을 따릅니까?
믿음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따르는 방식이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입니까? 폭력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세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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