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8주간 화요일]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2018.8.7
제1독서
<네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내가 야곱의 천막을 되돌려 주리라.>
▥ 예레미야서 30,1-2.12-15.18-22
복음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 14,22-36
베드로의 약한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종종 시련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 시련이 사실상 하느님께서 심심하셔서 하는 행동이라기보단
우리를 단련시키고 당신께 더욱 가까일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시련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시련을 겪다보면
군대에서 하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훈련 꼭 해야하나?
죽을 것 같이 만드는데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것입니다.
확실히 하느님께 가는 길은 힘겹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힘든 이유는 우리 탓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분명 시련을 주셨지만
치유가 되지 않는 이유, 시련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우리 탓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나는 네 원수를 시켜 너를 내리쳤으니 그것은 가혹한 훈계였다.
어찌하여 네가 다쳤다고, 네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고 소리치느냐?
네 죄악이 많고 허물이 커서 내가 이런 벌을 너에게 내린 것이다.
우리가 시련 중에 어떻게 행동하길래 더 힘들어질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시련이 힘들다고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을 뒤집을려하고, 돌아갈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나온 백성들이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외치던 것 같이 말이죠.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며 죄를 떨쳐내고 자신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함으로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내려놓는 길은 힘겹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구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야곱 천막의 운명을 되돌려 주고 그의 거처를 가엾이 여겨
그 언덕에 성읍을 세우고 궁궐도 제자리에 서게 하리라.
자 이제 우리가 시련 중에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 참으로 믿음에 대한 시련을 많이 겪은 분입니다.
거기에 믿음이 없다고 예수님께 혼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오늘 구원받는 모습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예수님을 뵙고 그분께 다가가기를 원하고 그것을 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시련을 허락하시자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그 중간에 시련을 겪습니다.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자 여기서 베드로는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자신의 뒤에 있는 안전해 보이는 배를 선택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목적지로 삼은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베드로는 배가 아닌 예수님을 찾으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가오십니다.
그에게 손을 뻗어 일으켜주십니다.
베드로의 부르짖음을 다시금 묵상해봅시다.
“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베드로가 믿음이 약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감히 예수님을 따라서
베드로가 믿음이 약하다고 비판할 수 있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 하셨을지라도
오늘 복음의 다른 제자들이 베드로가 믿음이 약하다고 이야기하던 이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비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분명 믿음이 약한 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셨듯이
베드로는 아무리 약한 믿음일지라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세상의 것보다는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얻은 것은 정말 사소한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세상의 것보다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될 것이란 것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약하다고 비판하기 전에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시련을 겪으면 세상을 찾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찾습니까?
어떤 반대를 겪으면 세상의 방식을 따릅니까? 하느님의 방식을 따릅니까?
고통스러울 때 욥과 같이 시련을 주신 하느님을 저주합니까?
아니면 베드로와 같이 시련을 주신 하느님을 찾습니까?
그 물위를 걷는 사건 이후에 많은 시련을 겪는 이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와서 왜 내가 이런 시련을 겪어야하냐고 따졌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다가가려 노력하고 그분께 더욱 의지했습니다.
그러자 시련을 겪는 이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그 주변 모든 지방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병든 이들을 모두 그분께 데려왔다.
그리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과 장애물들을 겪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인맥과 권력을 통해 그 장애물을 부셔버립니까?
물질적인 재화에 의지합니까?
힘의 논리로 부수려 하십니까?
뛰어난 지혜로 뛰어넘으려 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 나의 자녀들에게 시련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십니까?
그냥 참으라 합니까?
아니면 자식이 시련조차 못 겪도록 많은 세상의 것을 이용하면서 막아버립니까?
우리 중에 하느님을 믿으며 그 시련을 받아들이는 이는 없습니까?
하느님을 믿으며 그 시련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르치는 이들은 없습니까?
시련 중에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가르치는 이들은 없습니까?
나는 시련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
작은 믿음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아예 없습니까?
오늘 베드로의 그 약한 믿음을 기억하십시오.
시련 중에 세상이 아닌 주님을 찾았던 베드로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그런 겨자씨만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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