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2018.8.2
제1독서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 예레미야서 18,1-6
복음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마태오 13,47-53
하느님 나라가 운영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1코린 3.16)
오늘 나온 독서의 말씀은 아니지만 이 말씀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 즉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수많은 비유를 들며 말씀해 주십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하느님이 계신 곳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의 성전이라 불리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 나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한다면 하느님을 따르고 있는 우리가 곧 하느님 나라이며
그 하느님 나라가 그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오늘 복음은 비유를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종말과 같은 이야기로 들리지만
모든 것의 공통점은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거른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착각하시는 경우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건 좋고 이건 나쁘다고
단죄하는 것이 왜 옳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답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느님 나라의 외교 상황이 아니라
내정 상황을 이야기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부에서의 천사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지 알려주시고
주인은 어떻게 하시는지 알려주시듯
내부의 일이지 외부의 것을 다루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내부에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거른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의 옹기장이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옹기장이는 진흙을 손으로 빚어 옹기그릇을 만드는데,
옹기그릇에 흠집이 생기면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일을 되풀이하였다.
옹기장이가 좋은 그릇을 만들기 위해 있는 그 그릇의 흠집에 신경 썼지
다른 무언가의 흠집을 건드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면 또한 다른 이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면
우리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하고
또 다른 성전의 흠집을 빌미로 그 성전을 무너뜨리려는 단죄를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그 흠집을 알려줄 수는 있어도
흠집이 났기에 내가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전합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7)
다시 복음으로 돌아와서 결국 우리가 '하느님의 성전'으로서
올바르게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정돈하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을 해야합니다.
복음의 비유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모아들여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비유에 따르면 자신의 것을 '끌어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것까지 끌어올린 것입니다.
그러고는 앉아서 하나 하나 찬찬히 둘러보면서
좋은 것은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는 내가 한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되돌아보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행한 것은 담고
하느님과 반대되었던 것, 내 멋대로 행동하였던 것은
반성하고 회개하여 다시는 내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며 던져버린 것입니다.
내 스스로 성찰하지 않고서 내 것이 옳다
다른 사람보다 옳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바오로 사도 또한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기가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속이는 행동,
나의 그물에는 좋은 물고기만 있다고 이야기하고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고 이야기하며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들은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느님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고
내가 옳은 것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있죠.
그런데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침묵'과 '식별'입니다.
스스로 침묵하며 다른 이의 식별 또한 '성령의 식별'을 기다릴 수 있어야하는데
어떻게 해서든 회피하려합니다.
내가 틀렸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잃을 것이 많은 지혜로운 이가 아닌
잃을 것이 없는 어리석은 이가 되라고 합니다.
내가 무조건 옳아야 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내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과거든 현재든 내가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알고
내가 맞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이는 하느님 나라와 가까운 이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옛 선택으로 인한 파멸도 받아들이고
지금의 선택으로 인한 구원도 받아들이는 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와 가까운 이입니다.
받아들이고서 나쁜 것은 나빴다고 인정하고
좋은 것은 좋은 것이라 인정하면서
좋은 것을 취하는 이가
하느님 나라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내가 옳은 선택을 했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이 아니라
나나 다른 이가 옳지 않은 선택을 했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 옳은 선택은 좋은 방향으로 돌아옵니다.
형제 여러분 자신을 성찰하면서
내 안의 좋은 것은 무엇인가 나쁜 것은 무엇인가 바라보십시오.
과거의 죄를 지었더라도 그 죄의 결과인 파멸이 나에게 들이닥치고 있어도
옳은 선택을 한다면 그 수확은 올바르게 돌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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