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살아있는 가운데 죽은 이들

글쓴이 :  바울라님 2019-09-04 20:32:22   ... 조회수(2,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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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2019.9.2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 테살로니카 1서  4,13-18

 

복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4,16-30

 


 

살아있는 가운데 죽은 이들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죽는다면 심판 날이 다가와서 큰일 난 것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즉 죽은 이후에는 하느님의 심판 앞에서 있지만 내가 제대로 살지 못했더라면

그 자리는 구원이라고는 하나도 생각지 못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살아있는 이들 입장에서 특히 초기 교회에서 살아있는 이들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 받기 전에 죽은 이들은 참으로 절망스럽고

구원에서 동떨어진 이들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 말을 합니다.

주님의 재림 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죽은 이들보다 앞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우리보다 못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저승에 내려가셨다고

신앙고백 때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라고 가르칩니다.

죽은 이들이나 산 이들이나 모두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살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는 우리의 시선으로 죽은 이들이 구원에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얕게 본 것이며 우리의 교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고 다른 이야기를 해봅시다.

여러분은 죽은 상태가 어떤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생물학적으로 살아있지 아니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정말 훌륭한 것입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이도 죽은 이처럼 만드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멀쩡히 살아계시지만 몇몇 이들로 인해 죽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훌륭한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잖아 이 뜻,

목수의 아들이라고 얕보는 태도는 살아있는 이를 죽은 이로 만듭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휘황찬란한 왕의 아들로서 이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이들의 태도는 같았을까요?

목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미 그 사람을 사람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목수의 아들로서 얕게 볼 말, 죽은 사람처럼 취급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그 사람을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존중하기보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색안경을 끼고 그 사람을 바라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낮은 이고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버려질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놀랍긴 한데 귀 기울 필요가 없는 사람이죠.

그래서 애시 당초에 그 사람과는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관계가 끊어진 이들이 죽은 이들입니다.

또한 이런 죽은 이들이 우리 공동체에 있는 것은 불명예이며

공동체 자체에도 죽음을 가져올 존재들로 여겨집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과부와 나병환자 많이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치유 사례들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치유를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과 관계가 회복된 생명의 상태라 여겨지고

그렇지 못한 상태는 하느님께 죄를 지은 죽은 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죽은 이들이 필요했던 것은 몸의 치유였을까요? 물론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료법이 있었습니다.

예언자가 기적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치유법 사랑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면서 저렇게 하면 죽는 것이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내가 저렇게 되면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제에게 다가가 함께 슬퍼하고 그들이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사랑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여 각자의 내면에서 기쁨이 올라오게 하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어떤 상황에서도 구원은 이루어진다고 믿으십시오.

저승에까지 내려가신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관계가 끊어져서

사랑을 받지도 하지도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을 버려둘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이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완벽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한 가운데서 당신의 길을 가셨듯이

우리도 죽음의 한 가운데에서도

또 죽음의 한 가운데 있는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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