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축일]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2019.8.24
제1독서 <그 초석들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 요한 묵시록 21,9ㄴ-14
복음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 요한 1,45-51
부부가 서로를 바라볼 때
이리 오너라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를 너에게 보여주겠다.
오늘 요한 묵시록에서는 신랑이신 하느님의 신부를 소개합니다.
그 신부는 예루살렘 도성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도성은 단순히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표현되기도 하고 하느님의 성도들이 하느님의 신부입니다.
성경의 처음에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듯
성경의 마지막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혼인으로 마무리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로서 창조된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과 혼인하여 한 평생을 함께할 존재로서 창조되었고
하느님과 같이 성화되는 존재로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런데 혼인하는 사람들 사이의 태도로서 서로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나타나엘과 예수님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시로서 드러나는 관계지요.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고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먼저 나타나엘의 태도는 인간이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인간이 하느님과 마주하기 전에 참으로 가려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두터워진 원죄입니다.
원죄로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태어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잣대로서 하느님을 평가합니다.
또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했다하더라도 수많은 고난 속에 묻혀있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거야! 이루어질거야! 정말 이루어질까?’ 이렇게 변하는게
나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타나엘도 자신이 아닌 수많은 지식들 안에서 자신이 고대해온 희망을 바라보며
그것을 사랑한 나머지 나자렛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난 신랑을
보기도 전에 무시하게 됩니다.
이런 수많은 가림막 앞에서 필립보는 딱 한 마디만 합니다.
와서 보시오
예수님은 어떠실까요?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알고 계셨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무화과나무는 주로 외곽에 심어져 있던 나무였습니다.
다른 복음에서도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이야기됩니다만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는 성 밖에 있었죠.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외진곳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
즉 내면의 삶까지 모두 보시고서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예언서와 모세의 율법을 통달하며
거기에 담긴 희망을 믿고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충실히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나타나엘은 고백합니다.
자신이 하찮게 여기던 존재를 메시아로서 받아들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형제 여러분 나타나엘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신부로서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내면까지 모두 바라보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세상이 제시하는 희망과 다르다하여 헛된 이로 보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의지할 수 없는 존재로서 보입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보지 않고 이미 하느님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의 내면을 보시는데 우리는 내면을 보기를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더욱 깊게 바라보도록 노력하는 신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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