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0주일]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2019.8.18
제1독서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예레 15,10).>
▥ 예레미야서 38,4-6.8-10
제2독서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 히브리서 12,1-4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루카 12,49-53
‘있는 나’를 거부하는 세상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는 것에는 '그 말씀을 따른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번 주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스켐 집회 이야기를 보더라도
구약시절부터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하느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도 단순히 하느님의 공동체 속에 하느님의 보호 아래 걷는 것도 아니고
이민족들이 살고 있는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으로서 숨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 선포하시며 살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자유의지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펼치시며 살아가십니다.
그것도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살아가십니다.
그러니 수많은 자유의지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내가 자유롭게 좋다고 하는 것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선포한 말씀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빌론 제국의 위협 아래에서 하느님이 아니라
이집트에 정치적으로 의존하려 했던 모습에 대해
하느님께 의존해야한다고 선포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집트를 의지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도 함께 말이죠.
이들이 원하던 것은 정치적으로 이집트와 동맹을 맺어서
바빌론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이었는데 이 희망을 깨부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때때로 공상이나 이상론적으로 들리고
자랑할 것이 꺼려지며 많은 이들의 삶의 방식을 흔들어 놓습니다.
때로는 질투를 유발하게 만들고
때로는 자신들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신경 쓰게 만듭니다.
또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 결과가 인간적으로는 굉장히 부끄러운 결과를 내놓기도 합니다.
과거를 통해서 바라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미래의 결과로 보나
하느님의 뜻은 안 좋은 길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세상은 악한 일로 성공하게끔 만들어진 세상이니까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악한 세상이 제시하는 성공은 권력, 명예, 안정, 평화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유일한 주인으로서 살아갈 때 얻어지는 것들이죠.
유일한 주인으로서, 유일하기 때문에 다른 변수가 나타나면
신속하게 제거해야하는 것이 악한 세상의 성공을 향한 법칙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상 한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길을 따라야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진흙탕에 던져졌을 때 예레미야 눈에는 진흙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도 악한 세상 가운데에서는 악 밖에 보이지 않죠.
이 안에서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이 더 옳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의 뜻으로 둘러쌓여 있으니까요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그런데 세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변수는 있는 ‘나’입니다.
세상이 주는 성공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은 언제나 휘둘려야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해주고, 저렇게 이야기하면 저렇게 해주어야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대조되는 것은
예레미야와 적대자들이 아니라 예레미야와 치드키야 임금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세상 속에서도 자신이 따르는 것을 선언하는 '있는 나’인 예레미야와
이 말에 휘둘리고 저 말에 휘둘리고 있는 중심을 잃은 치드키야 임금 말이죠.
세상의 길은 다른 것이 ‘나’를 정의하게 만듭니다.
수없이 휘두르며 정신없게 하여 주변 환경이 자신을 정의하게끔 만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따르는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기다리고 사랑하십니다.
스스로 하느님의 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동의하도록 기다리시며
자신을 따르는데 억압이 아닌 자신의 온전한 자유의지로 행하도록 하시죠.
또한 이 자유의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당신이 그 길을 직접 걸으시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체험해야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의지해야합니다.
생을 살면서라도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감정이 세상사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그렇게 휘둘린 감정에 이성이 설득당하고
그렇게 무너진 감정과 이성으로 여러분의 의지가 무너집니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가운데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영이며,
사람은 그 영을 자신의 체험에서 다시금 기억하고 하느님을 붙잡습니다.
지친 가운데에서도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하느님께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길을 다시 걷게 되죠.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 자신을 정의하는 시대,
그 다른 사람도 어디서 내가 정의됐는지 모르는 세대
결국 공허함 안에서 자신이 정의되는 시대의 평화를 그리스도께서는 분열을 일으키십니다.
사람을 ‘공허한 존재’에서 ‘존재하는 존재’로 만드는 그리스도께서 분열을 일으키십니다.
형제 여러분 이 분열에서 우리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서 살아가게 하시는
하느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풍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존재로서 살아가겠습니까?
공허한 상태에서 주인으로 있고자 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으려는
세상에서 여러분이 ‘있는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영적투쟁을 벌이며 나아가야합니다.
다른 이가 여러분을 정의하게 두지 마십시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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