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2019.7.22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 3,1-4ㄴ
제2독서 <이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 코린토 2서 15,14-17
복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 20,1-2.11-18
부활의 첫 증인이 기본적으로 버린 것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볼 때 특히 서로 사귀는 연일들의 관계를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인간상이 있는 거죠.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또 이 사람이 나에게 이런 영향을 주었으면 좋겠다 같은 것을 요구합니다.
서로 관계가 깊은 관계일수록,
관계를 깊게 맺어야하는 관계일수록 이런 요구들을 서로에게 청하곤 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관계들이 틀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요구하는 것이 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선이 있기에 그 선에 맞아야지
자신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선이라는 것은 아무리 다수가 옳은 것이라 해도
이는 주관적인 기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가 아닌 주관적인 기준을 속된 기준이라 합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교리로 뭔가 훌륭한 인간상이 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니면 아름다운 공동체가 유지 되어야한다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예수님부터 초기 교회가 주장했던 것이 그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이나 교회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인간상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하느님을 찾고 그리스도인 자신을 따르라는 것이었고
교회가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음이고
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부활 전에는 다양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일곱 마귀에서 해방된 여인, 마르타의 동생, 돌 맞을 뻔 한 간음한 여인,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혹은 향유로 닦은 여인 등
결코 같은 사람이 아니지만 이 사람이 막달레나 마리아일거라는 추측이 많습니다.
그러나 명확하게 업적이 기록된 것은 부활 후 첫 증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증인이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막달레나 마리아가 주님을 찾을 때 한 가지 깨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자리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자리가 깨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에 있어야하는데 그 생각이 깨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향
이것이 무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없더라도 거기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무덤의 문도 열지 않고 두는 경우가 많죠.
내가 생각하는 선, 내가 확신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찾아야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어디 계셨나요?
막달레나 마리아가 보고 있던 방향과 반대 방향에 서있었죠.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오늘 제 1독서는 아가서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찾기 위해 거리와 광장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
사람이 있을 것 같은 곳을 찾아 헤맵니다.
그런데 결국 사랑하는 이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야경꾼들을 지나치자 만났습니다.
저도 처음에 착각을 한 것이 야경꾼이 단순히 야경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야경꾼은 경비입니다.
밤에 위협들을 지켜내기 위해 순찰하는 이들을 야경꾼이라고 합니다.
밤에 위협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두운 곳 가장 위험한 곳 죄가 생기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 죄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선을 키워내시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아름다운 인간상에 계신 분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하시는 분인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선이 옳지 못한 것이고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어느 자리에 있던지 예수님께서는 그곳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톨릭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느 자리에서든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곳에도 예수님께서 계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선 때문에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여기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파스카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기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