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 13주간 금요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2019.7.5
제1독서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
▥ 창세기 23,1-4.19; 24,1-8.62-67
복음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 마태오 9,9-13
함께하는 여정
오늘 독서에서의 아브라함의 종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 종의 여정은 참으로 힘겨운 여정입니다.
아브라함이 걸어왔던 그 길의 처음으로 가서 친족을 찾고
아브라함이 온 길을 다시 와야 하는 여정입니다.
이 종의 여정을 우리 신앙인으로 비추어본다면 대부모 역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앙의 여정으로 걸었던 십자가의 길,
신앙의 시작점에 있던 사람을 위해 그 처음으로 가서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는 길,
대부모의 길과 같고 신앙으로 초대하는 이들의 길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정에서의 당부사항은 조금 생각해볼만한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의 하느님이신 주님, 곧 나를 아버지의 집과 내 본고장에서 데려오시고,
‘내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맹세하신 그분께서
당신 천사를 네 앞에 보내시어,
네가 그곳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올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그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맹세에서 풀리게 된다.
다만 내 아들만은 그곳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
먼저 신앙인의 첫 시작점에 하느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종이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임을 드러낼 수는 있어도
그 주인인 아브라함과 이사악은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관계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충만하게 드러냈음에도 상대가 거절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의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앙의 여정은 끌고 가는 여정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나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레베카에게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레베카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여정에서 레베카는 자신의 주인을 봅니다.
그것을 알려주는 이는 이 사명을 받은 종이었습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함께하면서 하느님을 명확하게 알게합니다.
그 종에게 물었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는 저 남자는 누구입니까?”
그 종이 “그분은 나의 주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레베카는 너울을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위를 내려놓으시고 이 종의 신분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십니다.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약속의 땅에서 저 멀리 있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멀리 있는 그 자리에 다가가시어 그들을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그러나 신앙인들 중 자신은 약속의 땅에 앉아 있으면서
거만하게 저 멀리 있는 이들을 기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이 아닌 가는 여정에 있는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 도착한 것 마냥 저 멀리서 죄인들을 지도합니다.
죄인들과 계약만 맺고서 그들을 감시하는 이로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며 계약을 지켰나 아닌가만 살핍니다.
그들이 계약을 지켜야 그제서야 함께하려합니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그러나 신앙의 여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행도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위해 자유의지에 의해 하는 것이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듯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 여정을 다시 걷더라도
그들과 함께 하며 하느님께 나아가야하는 것입니다.
사실 의인들은 죄인들 가운데 있는 것이지 의인 그룹 안에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희생을 원하십니다.
어떤 희생이냐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비라는 희생을 원하십니다.
그들이 잘 못하더라도 함께 인내를 지니고 자비를 베푸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형제 여러분 모든 이들에게는 각자 숨겨진 하느님의 뜻이 있으며
하느님을 통한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 충만함이 드러나게 하는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 그 충만함은 함께 있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여러분이 감시자와 같은 위치에서 형제를 바라보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는 결핍, 부족함만 드러날 뿐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의 여정을 이끄는 사람이라면 함께하십시오.
함께하는 것이 이끄는 이의 길입니다.
처음부터 걷는 그 길을 걷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이끄는 직분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여러분이 이끌고자 한다면 그 자리에 함께 가서 신앙의 여정을 함께 걸어주십시오.
형제의 충만함이 드러나게 하는 삶,
그 삶이 예수님께서 걸어오신 삶임을 기억하십시오.
유리 너머에서 환자를 지켜보는 이는 실험하는 의사지만
환자와 함께하는 의사는 치료하는 의사입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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