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주님을 따르는 것.

글쓴이 :  바울라님 2019-07-18 20:51:48   ... 조회수(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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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 13주일]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2019.6.30

 

제1독서 <엘리사는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 열왕기 상권  19,16ㄴ.19-21

 

제2독서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 갈라티아서  5,1.13-18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  9,51-62

 


 

주님을 따르는 것.

 

종교를 갖지 않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가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면 여러 가지 규율이 생긴다.

그 규율들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종파에 얽매여서 살게 만든다.

마치 다단계와 같이 한 번 발을 들이면 사람들을 세뇌시켜서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실상 규제를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규제를 했을까요?

교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렇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했을 뿐 그 이상 규제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규제나 세뇌 같은 과정이 있었다면 천주교만큼 이렇게 냉담률이 많은 종교도 없겠죠.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사실 자유로운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유를 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만을 말씀하셨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보다 이를 가장 중요시하라는 말씀뿐입니다.

자유가 주어졌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선택하라는 것뿐 그 이상이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을 선택하면 우리가 세상을 선택하여 나온 태도가 자연스레 바뀌겠죠.

세상이 주는 평화는 당장 우리가 떳떳해질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그 떳떳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야 유지가 되죠.

세상의 논리에서는 늘 이야기가 됩니다.

사람이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죠.

세상은 하느님의 은총을 엄청나게 모작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처럼 생명을 보여주며

나를 따르면 이런 부와 명예와 권력을 누릴 수 있다고 보여주죠.

하느님께서도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노력해서 얻는 자유가 아닌

원래부터 있었던 자유를 알려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선택해야합니다.

이런 와중에 사도 바오로는 단호히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세상이 이야기하는 과정은 계속해서 다음 단계로 유도합니다.

이것만 넘어가면 누릴 수 있어 이것만 이루면 다 너의 것이야.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끝없이 조금만 더 라고 이야기하며

허상으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무언가 계속 채우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그 유혹에서 돌아서려 하면 의지도 없다 인내심이 없다며 비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초대는 간단합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면 인간의 모든 것이 완성됩니다.

다만 관계를 세상의 방식대로 즉, 하느님을 나의 이익을 통해 바라보거나

나의 작은 시야를 통해 바라보기 때문에 그 관계가 완전해지기까지 걸립니다.

그것 때문에 온전한 관계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 완전한 원래 인간의 특성들을 되찾게 됩니다.

경험을 초월한 것을 보는 능력,

자유로운 선택 능력,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능력,

서로 사랑하는 능력 등 본래 인간이 지녔던 모든 것들이 완성시켜줍니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또한 내려놓는 것에 대해서도 확인이 되는 것이 세상도 내려놓을 것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에 따르는 삶을 내려놓을 것을 요구하죠,

하느님께서도 세상을 따르는 삶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이 같아 보이는 요구도 결국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릅니다.

세상을 따라 내려놓은 것은 버려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내려놓은 것들은 하느님을 통해 완성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혹독한 말씀도 우선시 해야할 것을 우선시 하면

완성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죽은 이들을 기리는 것,

주님을 따르는 것과 가족을 챙기는 것 이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을 기리는 것과 가족을 챙기는 것은 일단 세상이 이야기하는 가치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하느님이 이야기하는 가치입니다.

이렇게만 두고 보면 세상을 따르는 것이 책임감 있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고

하느님을 따르는 삶은 모든 것을 내팽겨 치고

무책임하게 자기 살 길만 찾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런 차이가 아닙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것은 겉모습만 드러나는 것들이고

하느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내면의 충만함을 채워

그것을 통해 다른 것들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조선 후기에도 그렇고 다른 나라들도 그랬다고 합니다만

장례 때 돈 받고 곡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곡소리가 크게 날수록 효자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자식이 부모의 죽음에 슬퍼 크게 우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내면의 충실함이 없어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위선이 아닌 충만함으로 드러나는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선포 안에는 수많은 가치들이 담겨 있지만

그 안에는 하느님을 따라 사는 삶이 생과 사를 뛰어넘어 사람을 완성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뛰어넘은 희망을 인간이 갖게 하고

죽은 이들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는 과정이 드러납니다.

주님을 따름으로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시는 바와 같이

가족들을 그렇게 사랑함으로서 가족을 챙기는 것이 됩니다.

다만 관계라는 것이 발전하기까지 수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서로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말이죠.

그렇게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는

세상을 따르는 삶 속에서 겉모습 때문에 싸웠던 분열보다

더 깊은 내면부터의 분열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실 세상을 따르는 삶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삶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세상을 따름으로서 내 안에 또 공동체 안에 생겨난 어둠도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는 것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가기 힘든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당장 드러나는 어둠 때문에 빛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죠.

이것 때문에 더 힘들어질 거 같은데,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은데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피하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세상의 법칙을 따르게 됩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형제 여러분 너무나 긴 시간 모작되어 보편화 된 것 같은

세상의 법칙 속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우리의 노력에 따라 주어진 자유에 따라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법칙 속에 우리의 자유를 억압시켜서는 안 됩니다.

모작한 것이 아닌 본래의 것이 완성되어 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는 더 큰 자유가 있음을

모든 이에게 주어진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본래 갖고 있었던 것을 하느님을 따름으로서 되찾은 사람이 됩시다.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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