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2019.6.23
제1독서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다.>
▥ 창세기 14,18-20
제2독서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 코린토 1서 11,23-26
복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루카 9,11ㄴ-17
성체성사는 기념이 아닌 관계의 완성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 자신이 지닌 것들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자신이 지닌 것들이 수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실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주신 삶의 십자가는 힘든 것이 많습니다.
그것은 원죄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들은 맡은 바가 있었고 서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안에서 힘든 것은 있었지만 하느님을 통하여 살아갔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사실 힘들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힘들다는 이유로
나는 가치 없는 존재며 내 존재는 지금 아무것도 못하는 부정한 것이기에
나를 바꾸어야한다는 생각까지는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을 존중하면서 더 진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에 담겨 있는 것들입니다.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성체성사에 대해 강의나 강론을 들을 때
실체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체변화가 왜 중요한 것인지,
실체 변화라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합니다.
교회 일치 운동 가운데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는 점은
성공회에서 세례 받은 사람은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성공회는 분명히 가톨릭에 반대해서 나온 교파도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로 분리된 종파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례나 교계 제도가 다 비슷하죠.
그런데 영성체 관련해서 문제되는 것은 그들은 실체 변화를 믿지 않고
단순히 상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사를 해도 실체변화를 믿지 않고
단순히 상징으로서 성체성사를 거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의회 문헌에서도 “실체 변화는 없다.”라고 명시되어 있는 상황이고요.
그래서 일치 운동 이전에 이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한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 것입니다.
‘아니 분리된 것을 일치해서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 실체 변화가 중요해?’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성사이며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성체성사 교리는
우리 신앙의 중심인 파스카 신앙의 가장 기초를 담당하고 있기에
가장 중요한 교리이며 성사라고 봅니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럼 성체성사의 기본적인 것에서 확장해봅시다.
성체성사는 빵과 포도주가 성찬례 중 사제의 손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축복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완전히” 변하는 신비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그럼 먼저 빵과 포도주를 먼저 봅시다.
지금은 빵과 포도주를 성당에서 준비해줍니다.
직업이 농경만 있던 과거에서 다양하게 직업이 생기자 이를 돈으로 대체하고
성당에서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 주는 “사목적 배려”로서 조치가 취해졌지만
이를 통해 잊혀지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그 빵과 포도주를 우리가 준비해서 봉헌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성찬례에 대한 증언을 하기 전에
코린토 인들을 꾸짖을 때 한 가지 드러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자신이 직접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의 삶을 바쳐 양식을 만들어내서 먹어야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봉헌되던 빵과 포도주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삶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피와 땀이 모두 담긴 양식입니다.
이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모두 하느님께 바친다는 의미로도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을 모두 바쳐 나온 열매를 바치는 것이니 말이죠.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나타난 나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사를 매일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체성사 안에서
하느님께 우리가 열심히 준비한 완벽한 나 자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과정 중에 있고 부족한 존재지만 나의 삶을 모두 바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삶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나눠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그래도 부족한 것을 느낄 것입니다.
나 자신이 부족한 사람인데 그것 그대로 예수님께 갔다고
어째서 충만한 것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부족한 것을 드렸는데 충만한 것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제 1독서에 담겨 있습니다.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멜키체덱은 그리스도라고 이야기 되곤 합니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가 다름 아닌 멜키체덱의 손을 통해
아브람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사실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인이신데 그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가꾸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본래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나왔기에 인간이 그것을 본래의 뜻에 따라 잘 가꾸었든
자기 멋대로 다루어 하느님의 것이 아닌 죄인의 자신의 것으로서 갖고 살아갔던
그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완성시켜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 시작 아니 그 이전부터 내어주고 계셨고
우리 삶 안에서 계속해서 내어주고 계십니다.
또한 받아들일 준비도 계속 하고 계셨죠.
하느님께서는 관계를 이어가시고 교류의 준비가 늘 되어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도 모든 것을 내어드리고 있는 그대로 내어 받아야한다는 사실이죠.
이 관계는 쌍방으로 이루어져야합니다.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지금은 보편 사제직이 이야기가 많이 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충만함을 받아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의 파스카 신앙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함축된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의 죽으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파스카 신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이유는
우리 앞에서 우리를 통해서 온전하게 계속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성체 성사를 통해 ,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신비를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주십시오. 그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며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당신께서 내어주신 것을 다시 받으시어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을,
충만하게 해주시는 것을 알고 믿어야합니다.
이는 강제로 믿어야하는 신앙이 아닌
우리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믿을 교리라 부르는 것입니다.
현세의 고통과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그 충만함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충만함을 통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성체성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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