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충만함의 일치

글쓴이 :  바울라님이 2019-06-17 12:05:00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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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기념일]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019.6.13

 

제1독서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 코린토 2서  3,15─4,1.3-6

 

복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오  5,20ㄴ-26

 


 

충만함의 일치

 

우리의 감정 중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수치심이라고도 불리는 감정입니다.

이 부끄러움은 우리가 부족함을 느낄 때 부끄러워합니다.

또 자신이 부족함에 상대에게 나아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확실한 선을 만들어줍니다.

서로 부정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조심하며

또 스스로도 부정함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으로 그어진 선은 사람과 사람이 단절되게 만듭니다.

일치에 상당한 장애를 가져오죠.

과거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의 알몸을 보면 부정한 것이라 여겨 고개를 돌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처음을 생각해보면 알몸은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로의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모습이었습니다.

그 드러낸 모습으로 서로의 충만함을 보았고 서로 일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죄로 인해 서로의 모습을 부족한 결핍의 존재로 바라보며

부끄러이 여기며 부정한 것이라 여겨 고개를 돌리고 자신에 대해서도 부끄러이 여겨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통해 이 부끄러움, 너울을 벗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그런데 부끄러움의 좋은 기능을 들은 여러분들은 조금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선과 예의가 있는 것인데

부끄러움을 치워버리면 그런 선이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서로 좋지 않은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선을 지키지 않고 상대에게 지나치게 무례하고 피해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 지칭하기도 합니다.

단순히 부끄러움을 치워버리면 그런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바라볼 때 스스로의 부정함을 보지 못하고 당당하게 여기기도 할 수 있으며

타인을 대할 때 무례하게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통해 부끄러움을 치우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한 처음에 인간과 인간이 부끄러움을 모를 때 그들 사이에 선이 없었을까요?

한 몸이었기에 아무런 선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통해 이룬 그 한 몸은 일치를 이루지만

동시에 자신의 고유성도 충만하게 채웠습니다.

일치도 100% 고유성도 100%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도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고유성도 명확하게 드러내십니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할까요?

하느님을 통해 자신의 충만함을 채운 상태로 서로의 충만함을 통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서로가 결핍인 상태에서 일치를 이루고자 하면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를 단순히 이익을 위해 맺은 관계로서 서로의 것을 빼앗아가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를 충만하게 채울 수 있습니다.

인간 존재의 정의는 모든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보이는 것 이상을 보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을 봄으로서 얻어진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도 하느님과의 계약 안에서 선택을 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다스리는 직무도 하느님께서 창조 목적으로서 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핵심은 바로 관계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인간성을 발견하고 충만한 상태였지만

혼자인 인간이 단 한 가지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고서

부족한 것을 느끼는 것이 자신과 같은 존재와의 관계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서로와 관계를 맺으며 한 몸이 되는 동시에

남자와 여자라는 새로운 질서와 의미와 가치로 재탄생됩니다.

자신이 충만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서로의 충만함을 교류하여 서로 완전히 일치되며 서로의 고유성이 확실해집니다.

하느님을 통해 자신의 기본적인 충만함을 채웠듯이

인간과 인간의 교류로 이 충만함이 더욱 풍성해져

서로로 인해 새로운 질서와 의미와 가치를 부여 받아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지만 이러한 원죄 상태에서 하나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 하더라도

상대가 원죄 상태에서 일치를 위한 교류를 한다면 한쪽은 지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러한 교류에 대해 미리 경고하십니다.

 

우리의 복음이 가려져 있다 하여도

멸망할 자들에게만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경우, 이 세상의 신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하느님의 모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의 부족함을 보며 부정하다 여기고서 피하는 것이 맞을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니 그러면 되는 걸까요?

사실 모든 인간이 충만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일 뿐 그 충만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고유성은 존엄하며 충만함이 있습니다.

이 충만함을 함부로 부정하다 여기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형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관계의 회복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 책임이 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하느님의 사람이고 형제와 관계를 맺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

형제의 회개임을 안다면 형제의 회개를 위해 수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을 믿으라는 외침만이 아닌 그 형제의 본래 있는 충만함을 발견하고

형제가 충만하게 살게 할 것입니다.

자신 안의 충만함을 발견하지 못해 타인을 이용하려 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충만함을 먼저 발견하고 발전시키도록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 형제의 충만함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여러분이 하느님을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창조 때에 보시니 좋았다는 그 시선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 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과 교류함에 있어 나 혼자보단 서로의 친교로 일치를 이루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일치를 이루기에 부족한 상황이면 어쩔 수 없지만

공동체의 친교를 통해 우리의 성사는 더욱 충만해짐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제가 성체성사에 대해 개인의 봉헌에 대해 수없이 강조해왔습니다만

가장 아름다운 성체성사는 공동체의 성체성사입니다.

공동체가 아니면 관계를 맺은 이들이 하느님을 향하는 하나 되는 상태에서 성체성사,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친교를 통한 교환의 신비를 누릴 때 가장 아름다운 성사가 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충만한 일치와 재탄생한 충만한 고유성인 한 몸이

그리스도와 교류함으로서 하느님과 일치되며

그 한 몸이 새로운 고유성을 지니면서 일치가 더욱 강해지고 고유성 또한 더욱 튼실해집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자신의 충만함을 인식하십시오.

형제의 충만함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형제와 함께 하나 되십시오.

형제를 통해 서로를 위한 존재로 재탄생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일치된 모습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개인의 충만함보다 더 큰 충만함인 일치의 충만함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빕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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