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먼저 나를 쇄신시키십시오.

글쓴이 :  바울라님이 2019-06-17 11:06:52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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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대축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019.6.9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  2,1-11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 코린토 1서  12,3ㄷ-7.12-13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 요한  20,19-23

 


 

먼저 나를 쇄신시키십시오.

 

과거에 교부들은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라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맞다고 하는 분들도 있고 반발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맞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무엇에 반발하는 것인가요?

아마 보통은 성속이원론

즉 교회와 세상을 분리해서 교회는 구원을 받고 교회를 믿지 않는 세상은 멸망할 것이라는

관념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회는 이를 잘못된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이를 성속이원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해석이라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이를 복음적인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안으로 향하는 교회 밖으로 향하는 교회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를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사도들의 성령강림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그들의 내면을 가득 채웁니다.

사도들은 이 가득 찬 것을 밖으로 선포합니다.

이것이 안으로 향하는 교회와 밖으로 향하는 교회의 기본 틀입니다.

안으로 향하는 교회를 통해 밖으로 향하는 교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모든 내적 쇄신을 이루어 내 안에 하느님을 채우고

그렇게 맺어진 하느님 관계를 완전히 하는 것이 안으로 향하는 교회 ,내적 쇄신의 교회이며

그걸 통해서 나오는 삶 나오는 말과 행위들이 밖으로 향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단순히 교회이야기이지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는가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마음에 성속이원론이 참으로 깊게 들어온 것입니다.

사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은 교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사도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는 것일까요?

사실 교회의 시작이 성당에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진 이들이

나아가 ‘예수를 믿으십시오.’ 외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또한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 기억 상 초기 교회부터 지금까지의 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당에 눌러 앉아서 사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성당에 상주하는 것은 3명 정도? 상주 신부님과 수녀님 뿐

그나마 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성당 직원들

그들보다 조금 덜 지내는 이들이 성당에서 활동하고 봉사하시는 분들이고

대부분 자신의 삶을 살면서 성당에 옵니다.

이게 문제라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정상적인 것이란 겁니다.

성당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그 하느님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단순히 교회 내부의 직무로만 여기는 것은

성속이원론적인 사고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모든 삶,

즉 그리스도인 각각의 삶에서 하느님의 관계를 통해서

한 처음에 인간이 피조물들을 마주하면서 이름을 붙인 것과 같이

자신들이 마주하는 모든 것에 하느님의 가치와 하느님의 뜻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협력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사는 삶에 수정보완은 있을지언정 배척은 없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서양 중세가 닫혀있고 폐쇄적인 시대였다고 이야기합니다만

참으로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열린 시대였고 그렇기에 큰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유행한 스콜라 신학은

모든 것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단 사상이라 불렸던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서

하느님의 이야기를 끌어올리던 시기가 바로 중세기입니다.

모든 것을 섭렵하고 받아들여 그것을 긍정적으로 소화하려한 시기가 바로 중세기입니다.

오히려 종교개혁 때 비판하고 나온 신학이 폐쇄적이고 배척적이었죠.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야기했으니

그는 이단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지금의 신자들조차 잘못 알고 있는 수많은 가톨릭에 대한 오해는

중세를 이해하지 않고 오직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을 바라본 것에서 오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원래부터 모든 것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성속이원론 즉 거룩한 것이 있고 속된 것이 있다고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가르는 오해를 범한 것이 가장 대표적으로 영과 육체입니다.

가톨릭은 육체가 더러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바가 없습니다.

육체가 신성한 것이 아닌 더러운 것이라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셨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즉 모든 삶에 하느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삶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시에 단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사도들에게 드러난 수많은 언어는 수많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벗어난 무언가가 아니라 여러분의 삶에서 실현되는 하느님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서 여러분의 삶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삶을 통해 드러내는 하느님의 현존,

밖으로 향하는 교회, 여러분 자체가 교회가 되어

여러분 자체에 이미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성사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안으로 향하는 교회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을 통한 삶을 살아가고 하느님을 통한 인격적 친교를 이루십시오.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현존을 밝힐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십시오.

하느님 관계를 회복하고 그것을 통해 살아가십시오.

안으로 향하는 내적쇄신을 통해 밖으로 향하는 교회, 모든 선행이 완성될 것입니다.

성령강림을 맞이하여 단순한 신심활동 등의 자신의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성찰하며 하느님과 일치되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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