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하느님을 가장 1순위에

글쓴이 :  바울라님이 2019-06-07 10:26:06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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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금요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2019.6.7

 

제1독서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사도행전  25,13ㄴ-21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요한  21,15-19

 


 

하느님을 가장 1순위에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담화가 이루어집니다.

우리말로 보면 저 담화가 단순히 사랑하는가 담화를 나누는 듯하고

또 베드로도 당당하게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랍어 성경으로 저 구절을 보면 조금 베드로의 힘없는 대답으로 보입니다.

우리말로는 합쳐서 사랑으로 번역된 글자가 원문에는 세 가지의 글자로 나뉩니다.

세 번의 물음 모두 같은 물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순서대로

너는 나를 아가페하느냐

너는 나를 아가페하느냐

너는 나를 필로스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에

베드로는 아가페라 대답하지 못하고

제가 주님을 필로스 하는 걸...

제가 주님을 필로스 하는 걸...

제가 주님을 필로스 하는 걸... 라고 대답합니다.

아가페와 필로스 최대한 있는 느낌 살려서 번역하자면

아가페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자기비허적 사랑”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것이며,

필로스는 “인격적 친교”를 이야기합니다.

이 둘은 같은 맥락이긴 하지만 지금 들으면 다른 의미임을 느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기비허적 사랑을 요청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자기비허적 사랑은 무엇일까요?

이를 생각하기 위해 하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이 수동적이라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나태나 무기력함을 생각하신 분이 있고 그렇기에 죄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가톨릭에서 수동적이라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풀어서 이야기하면“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맡겼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에 두고 하느님을 기반으로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사람이 하느님 앞에 가기 위해 선행을 하고 노력을 해야지

하느님께 모든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하느님께 무례 아니냐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수동적인 것이 반드시 무기력함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오로가 그렇게 산 사람이거든요.

바오로 논쟁에 아무런 관련 없던 이가 바오로의 이야기를 치우침 없이 바라보니

“그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라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이런 신앙이 목격된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의 영성을 보면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을

하느님보다 우선시 한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3,4위로 밀려난다.

그 후 앞에 있던 해야 할 일을 끝내면 하느님보다 그나마 뒤에 있던

하느님이 4위면 5위에 있던 나만의 시간이 앞으로 오게 된다.

할 일을 마쳤으니 쉬어야한다고 그렇게 하느님은 저 멀리 내려가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일 시간이 없다는 그것 때문에 하느님이 저 멀리 내려가곤 합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죠.

수덕신비 신학 5권에서는

하느님을 최고로 높이기 위해 다른 것들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아가페 사랑에 대해 물으시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우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비우라고 초대하시는 것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베드로에게 하는 질문을 여러분도 따라와 보시길 바랍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게임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애니메이션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영화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만화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운동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술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담배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노는 것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너를 즐겁게 하는 것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여기까지는 여러분들도 아픈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덕 신비신학에서 말하는 부정은 이 정도로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부터는 뭔가 이상하단 느낌이 들기 시작할 겁니다.

 

너는 공동체의 친교와 일치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네가 고치려하는 형제의 결점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규정과 정의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자비와 공정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지금 하는 기도들 염경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신학하는 것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잘 하려는 일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네가 만들어야할 너의 열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미사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부끄럽게 여기는 과거 보다 또 자랑스럽게 여기는 과거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네가 변하고자 하는 네가 목표로 삼은 모습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네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또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네가 바라보는 현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너 자신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지금의 너 그 자체와 함께하는 나를 사랑하느냐?

 

이와 같이 신학하는 것이 부정신학입니다만 부정신학은 참으로 많은 오명을 받아왔습니다.

개신교와 같이 나만의 구원을 여기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신성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부정하여 신성모독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부정신학의 출발점은 하느님의 불가해성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한다하여도 하느님은 아무런 위해를 겪지 않습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나를 비우는 자기비허 모두

하느님을 통해 이루어짐을 배운 것입니다.

교회 세상 이 모든 선한 열매가 삼위일체 하느님을 기반으로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부정하여 무너진 건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가 하던 것들이죠.

하느님 없이 기쁨을 모작하던 것,

하느님 없이 일치를 모작하던 것,

하느님 없이 기도를 모작하던 것,

하느님 없이 신학을 모작하던 것,

하느님 없이 성찰하여 스스로 변하여 하느님의 열매를 모작하던 것,

하느님 없이 선악과를 통한 원죄, 스스로 선악을 갈라 판단하여 하느님 나라를 모작하던 것,

하느님 없이 내가 모작하던 것들이 무너지고

나와 하느님만 남은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기비허적 사랑을 통한 인격적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내가 부정하고 비웠던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완성됩니다.

본래의 하느님의 것이 인간에 의해 제멋대로 다뤄지지 않고

하느님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근거로 영성에서 나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하느님을 통해 나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성립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영성신학에서 수동성,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긴다는 의미는

절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구간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 사도는 아가페를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질문에서 필로스로 물어보십니다.

이 모든 것과 함께하더라도 너는 나와 인격적 친교를 맺고 있느냐?

제가 아까 쭉 했던 질문에서 마지막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너는 지금의 너 그 자체와 함께하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오늘 독서를 듣기 전에 본 기도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문을 열어주셨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큰 선물을 주셨다고 인정했습니다.

그것을 전제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해달라는 청원에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아멘이라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큰 선물은 무엇입니까?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미 이루어졌지만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기에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나 

하느님을 통해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는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결실도 아닌 온전한 선물입니다.

우리가 믿어온 바는 우리 현실에 이미 있는 것을 믿는 것이지

막연한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닙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저는 저와 영적 동반하는 이들에게 변하려 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변하고자하는 것으로 인해

지금 이 자체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나의 이상향으로 시선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원순수로 나 자신을 하느님을 통해 하느님 모상으로서 충만함을 바라보지 못하고,

원죄로 나의 결점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나 자신과 이미 함께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보지 못하기에

긴 기간 변하려 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었습니다.

먼저 그 자체에서 인지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온 하느님 나라, 우리가 믿어온 바는 가장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사실 자기비허도 그 무엇보다 하느님을 붙잡고 있음으로서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무엇보다 가장 1순위로 붙잡고 있던

하느님과의 인격적 친교인 필로스가 아가페가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모든 것을 하느님을 통해서 행하게 되며

우리가 부정하면 안 될 것 같은 것들,

어느 정도 악하다 생각하여 쉽게 내던졌던 처음의 것들이 

모두 하느님 뜻 안에서 다시 완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끊임없는 친교를 약속한 베드로에게 예언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은

각자의 내적 쇄신을 통해 이미 나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과 인격적 친교를 맺으며

나의 기준을 비워감으로서

내 기준의 단죄로 바라보지 못했던 공동체의 형제의 충만함을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사실 다른 모든 것은 여유를 갖고 행해도 됩니다.

사실 우리가 시간이 없이 급한 것은 하느님과의 친교

우리가 하느님을 삶의 기반으로 삼는 것입니다.

뭐 하나 빼먹지 않고 하느님을 통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유를 지니십시오. 급해야할 것만 급하십시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라라.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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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미카엘라모바일에서 올림 (2019/06/07 22: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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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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