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절대성은 인간을 억압하고 상대성은 인간의 주체성을 되찾아준다. 진짜로?

글쓴이 :  바울라님이 2019-06-06 21:52:16에 올려주신 글  ... 조회수(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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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목요일]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2019.6.6

 

제1독서 <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 사도행전  22,30; 23,6-11

 

복음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요한  17,20-26

 


 

절대성은 인간을 억압하고 상대성은 인간의 주체성을 되찾아준다. 진짜로?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나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나 된다는 것을 쉽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집안에서 배우자와 하나 되는 것도 참으로 힘든 일이고

그 배우자 사이에서 낳은 아이와 하나 되는 것도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도 둘 그리고 셋 사이에 하나 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 될 수 있는 것은 절대성을 지닌 분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목적 안에서

각자의 역할들이 주어져 하느님의 주권 아래 완성되어갑니다.

자연의 메카니즘이 다양하게 있으나 하나 됨을 보이는 이유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 중 특히 인간은 하느님께서 직접 통교하시며

이런 세상을 다스리는 창조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통해 살아가며 우리의 창조 목적이 완성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 삶은 우리의 주체성을 살리며 우리가 충만하고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완성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모상성을 완성할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런 가르침 아래에 우리는 세상의 창조자인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하나 됩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21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

 

그런데 이런 절대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입니다.

상대주의는 절대성이 제시하는 절제를 거부하며 나타난 현상입니다.

절대성이 옳고 그름으로 나누어 자신들이 선하다 한 것은 성스러운 것으로

악하다 한 것은 부정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절대성은 수많은 삶을 부정한 삶으로 악한 삶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주체성을 되찾기 위해 모든 이들의 옳음을 받아들이겠다.

이것이 상대주의입니다.

절대성이 삶을 부정한 것으로 취급했을까요?

절제는 부정한 것을 정하고 하지 말라는 명령일까요?

 

하나의 예를 들자면 '인터넷 방송에 대해 절제하라'는 가르침을 권고하는 것에 대한 

두 가지 방향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인터넷 방송은 포르노와 같다.

그 구성은 돈을 주면 방송인이 시청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포르노와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기에 그것을 피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에 좋다.” 라고 주장했고

다른 하나는 “그 문화에 참여하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한 채 거기에 빠진다면

거기에 취해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가게 된다.

문화에 참여함에 있어 자신의 주체성을 가지고 행동하며

필요할 때 멈출 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중 가톨릭의 가르침에 맞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후자입니다.

가톨릭이 가르치는 절제는 주체성의 확립 인간의 자유의지의 힘을 키우고

자신의 삶을 흘러가는 상황이나 자신에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이 주체성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을 주장합니다.

가톨릭은 충만한 앎을 통해 인간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온전한 자유의지로 주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주장합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은 어떤 대상이 부정하기 때문에 절제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일부 몰이해한 이들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마치 초기교회에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을 부정한 이로 여겨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한 이들처럼 말이죠.

만약 가톨릭이 무언가가 부정하기 때문에 절제하라고 한다면

이는 우리 교리에 논리적 모순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사도 베드로에게 환시로

“하느님이 만드신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정함을 선포하는 것은 대부분 충만한 앎에 의해서가 아닌

어설픈 앎을 가지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교만에서 옵니다.

부정하다고 하는 순간 그것은 보면 안 되는 것이 되어

그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섭리와 충만함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앞서 제시한 부정하다고 이야기한 저 주장을

인터넷 방송 문화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전하면 콧방귀를 뀔 이야기입니다.

그 문화 안에서 방송인은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을 지니고서 하는 것이

그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입니다.

또한 시청자들은 돈을 주고 요구를 하더라도

방송인이 이끌어가는 방송 흐름에 맞게 요구하는 것이 예의고요.

그들 문화 안에서 암묵적으로 흐르는 예의가 있습니다.

그것을 어긴다면 방송인이든 시청자들이든 그 문화 안에서 내쫓기거나

아예 무시 받게 됩니다.

단순히 그 문화에 있는 시스템을 대강 안다고 하여

자신이 아는 것을 부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정하다 이야기했기에

그 안에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규칙들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가톨릭에서는 감정적으로 또 어설픈 앎으로

주체성 없이 살아가는 것 외에 부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제가 절대성에 대해 예시까지 들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가톨릭이 주장하는 절대성에 대한 오해를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상대주의를 그만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안에서 복음 상대주의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나는 이 말씀은 맞는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아닌 것 같다.

또 이 교리는 맞는 것 같지만 이 교리는 아닌 것 같다 하며

가톨릭의 것을 자신의 옳고 그름에 따라 받아들이고 말고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상대주의에서도 자신의 주체성을 띄는 듯한 가르침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아십니까?

“현실적으로” “상황에 따라” 라는 단어로 바뀌게 됩니다.

자신의 주체성 있는 결정과 관념은 사실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대주의에 빠진 이는 내가 방금 부정한 이야기라도

1분 뒤에 나의 상황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이야기라면 바로 그 이야기를 긍정합니다.

어설픈 앎과 오락가락하는 감정에 휘둘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상대주의입니다.

상대주의는 주체성을 외치고 나왔는데 결국 주체성이 사라진 삶을 보이게 됩니다.

이런 상대주의의 문제점은 어떤 것은 순식간에 지나치게 긍정함으로서 우상화되어

그 안에 주체성을 깎는 요소를 보지 못하게 하며

순식간에 지나치게 부정함으로서 그 안에 있는 충만함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감정적으로 어떤 이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외치다가

얻을 것이 없으면 바로 버리는 것이 상대주의입니다.

어설프게 어떤 이가 부정하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외치다가

그 이야기로 자신이 불리해지면 아니면 말고 하며 태도를 바꾸는 것도 상대주의입니다.

오늘 군중은 바오로를 심판하기 위해 모입니다.

이들은 율법에 따라 바오로가 죄인이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자신들이 몰랐던 사실을 선포하자

바로 하나였던 군중은 흩어져 분열하게 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사이이며 바리사이의 아들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이런 말을 하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중이 둘로 갈라졌다.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취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복음을 어떻게 대합니까?

현실적으로 이 말씀은 지킬 수 있지만 이 말씀은 지킬 수 없는 것입니까?

상황적으로 이 말씀은 따르지만 이 말씀은 따를 수 없는 이야기입니까?

복음은 여러분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여러분이 본래 지녔던 인간의 충만함, 완전한 자유의지와

기다림을 통해 온전해진 앎과

기다림을 통해 안정화된 감정 속에서

아무런 압박 없이 주체성을 지니고 선택할 수 있게 해줍니다.

온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현실적으로 상황에 따라 복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는 그것으로 모든 이가 주체성을 지니고 하나 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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