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제4주간 월요일]
<나는 양들의 문이다.>
2019.5.13
제1독서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 사도행전 11,1-18
복음 <나는 양들의 문이다.>
✠ 요한 10,1-10
보호를 위한 울타리는 문이 달려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양떼 도둑은 어디서 들어오나요? 바로 밖에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쁜 것들은 밖에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울타리 안에서 성스럽게 지켜져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밖으로 떠나게 된다면 저주받은 이들이 되기에 밖이랑은 접촉해서는 안된다.’라고
말씀드린다면 여러분들은 받아들일 수 있나요?
반은 받아들이고 반은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하느님 영역 안에 있어야지 하느님 영역 밖에는 생각지도 건들지도 말아야지 하며
수긍하는 이들과
다른 의미로 억압으로 받아들이며 의문을 갖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울타리 개념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강하게 생각하던 개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에게 크게 반발했던 것입니다.
사도들과 유다 지방에 있는 형제들이
다른 민족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 받은 신자들이 그에게 따지며,
“당신이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니요?” 하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안에서 예수님께서 크게 비판 받았던 사실을 기억해본다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큰 아픔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편으로 트라우마 같은 거죠.
그들의 역사에서 이방인을 또 죄인을 받아들였다가 당한 수모는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을 받아들였다가 이스라엘 안에서 우상숭배가 성행하였고
죄인을 받아들였다가 똑같이 죄에 빠지게 됩니다.
시편에서도 죄인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많이 보입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의 구원이 멀어졌고 최종적으로 유배까지 가게 된 이스라엘에게는
참으로 트라우마였을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는 하느님의 울타리는 참으로 크게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자는 신기한 모습을 보입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목자는 그 울타리에서 양들을 데리고 나갑니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울타리에서 양들을 데리고 나가는 목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목자를 기억하며 도둑을 생각해봅시다.
도둑은 분명 밖에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도둑은 양을 훔쳐서 어떻게 할까요?
훔친 후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어둡니다.
자신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단단히 지키며 감당이 안 되는 양은 죽입니다.
양은 갈수록 좁은 울타리 안에서 고립되어 갑니다.
도둑은 어떤 사람을 자신의 세운 울타리 안으로 끌고 오는 이들입니다.
자신이 만든 기준을 세워두고 그 기준에 맞는 이들을 수용하고 그 안에 갇히게 합니다.
또한 그 기준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죽입니다.
한편으로 이스라엘이 세운 하느님의 울타리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것이 아닌 이스라엘이 트라우마를 통해 세운 울타리가 된 것입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두 번째로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인간은 다양한 이유로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칭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운 울타리로 인해 하느님의 목자나 양떼가 아닌 도둑이 됩니다.
이 울타리가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보호의 목적으로 만들었다면 그 울타리에는 문이 있습니다.
어떠한 튼튼한 성도 문이 없는 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립되면 그 안에서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우신 울타리를 잘 보십시오. 무엇이 있습니까?
문이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나오기도 들어가기도 합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아가는 것을 비판합니다.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가만히 있는 것을 비판합니다. 퇴보하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울타리입니다.
나아가는 것이 좋고, 가만히 있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나아가는 것이 나쁘고, 가만히 있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풀밭을 찾아서 나아가기도 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보호되기 위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풀밭을 찾아 나아가자고 말씀하시는데
나아가는 것을 비판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하느님께서 보호하시기 위해 울타리로 인도하시는데
가만히 있는 것을 비판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자신의 울타리를 친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울타리로 하느님의 활동범위를 좁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울타리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상황이라는 이름으로 짓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형제 여러분 자신의 울타리를 내려놓으십시오.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울타리를 하나하나 내려놓으십시오.
그럴수록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만든 것을 스스로 판단으로 속되다 한 것의 판단을 내려놓는다면
온전한 하느님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살아감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삶을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