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아타나시오 주교학자 기념일]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2019.5.2
제1독서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 사도행전 5,27-33
복음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 3,31-36
그리스도의 나무는 적대자를 기다립니다.
가톨릭과 유사 종교인 프로테스탄트교 우리는 이들을 개신교라 부릅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으로 자신의 길을 가게 된 이들은
가톨릭을 어떻게 비판하고서 나온 것일까요?
이 당시 루터는 가톨릭의 제도를 통해 가톨릭의 전승을 비판했습니다.
가톨릭의 전승이 하느님의 본래 말씀을 막고 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말씀의 원전인 성경을 통해서 신앙을 회복해야한다고 말이죠.
그렇기에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의 교의와 교리 등의 신학이
권위에 대한 적대 세력으로부터 가톨릭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비판하죠.
이에 몇몇 이들은 하느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재반박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마침 오늘 아타나시오 성인의 기념일입니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아리우스 이단,
즉 성부가 하느님이고 성자는 반신이요 성령은 이 둘의 부하 같은 개념이라고 하던 이단에
대항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지켜낸 성인입니다.
오늘 이 성인의 기념일인 만큼 한 번 생각해봅시다.
가톨릭의 교의나 신학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전승은 적대 세력에 대항해서 나타난 것일까요?
하느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요?
적대자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논해지기는 하지만
신학이나 전승이 무언가를 적대함으로서 발전한다는 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오늘 유다 지도자들이 행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가톨릭이 유다 지도자들로 인해 일으켜졌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들은 가톨릭을 반대합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지시하지 않았소?
그런데 보시오, 당신들은 온 예루살렘에 당신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면서,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가톨릭 전승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으로
받은 씨앗을 키움으로서 자라난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보고 들은 것을 통해서
또 성령의 이끄심을 통해서 그 전승이 이어진 것입니다.
교계제도는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사제 독신제는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미사는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모두 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가지고 있던 씨앗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씨앗을 키워나갔고
자신들과 다른 이들에게 그 열매를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럼 적대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한 것인가?
신학은 적대자들을 대적하며 이어온 것이 아닌
자라난 나무에서 허기진 이들에게 열매를 주듯이 함께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반대되는 이들이 나타나면 어찌하겠습니까?
대적하겠습니까?
그러나 가톨릭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 가톨릭 신앙입니다.
나와 대화함으로서 하느님께 이끌어 그들의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며
나 또한 그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가톨릭 신앙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나무가 있었고 그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그리스라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이들이 있고
반면 먹지 않는 이들이 있던 것입니다.
하늘의 것이 땅에 있는 이들에게 닿도록 왔지만
그것을 받아들인 이가 있고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혹자는 반대하는 이들이 그리스도라는 나무를 베어버리면 어쩌나 걱정합니다.
그래서 반대자들을 배척합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오 성인의 삼위일체를 변호하기 위한 노력들을 살펴보면
하느님의 신비라 여겨질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아리우스 이단이 교회 안에서 반 이상이 찬성을 하던 것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땅에 뿌리를 둔 나무,
플라톤 사상과 유대교 사상에 입각한 그리스도를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뿌리를 둔 나무 삼위일체는 수적 압도된 상황에서도 정식 교리로 인정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참으로 하느님의 섭리라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많을지언정 하느님의 나무는 굳건하게 그들을 기다립니다.
그들이 천상의 열매를 받아들여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배불리시기 위해 말이죠.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어 주셨네.
형제 여러분 신앙생활 안에서 가톨릭을 적대하는 세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적대로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내면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우리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먼저 찾아야합니다.
그 하느님을 통해서 다른 조각,
부족한 조각인 이단을 채우기 위해 기다리는 이들이 되어야합니다.
사도들은 대사제들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며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먼저 나아가 기다립시다.
우리가 신앙을 하는 이유, 신학을 하는 이유, 전승을 따르는 이유는
무언가를 적대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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