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스카 성야]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2019.4.20
제1독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 창세기 1,1―2,2
제2독서 <우리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 창세기 22,1-18
제3독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갔다.>
▥ 탈출기 14,15―15,1ㄱ
제4독서 <네 구원자이신 주님께서는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기신다.>
▥ 이사야서 54,5-14
제5독서 <나에게 오너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 이사야서 55,1-11
제6독서 <주님의 불빛을 향하여 나아가라.>
▥ 바룩서 3,9-15.32―4,4
제7독서 <정결한 물을 뿌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겠다.>
▥ 에제키엘 36,16-17ㄱ.18-28
서간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 로마서 6,3-11
복음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 루카 24,12
여러분의 부활은 어디에 있습니까?
거룩한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축하합니다.
가톨릭 신앙은 바로 부활신앙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이 부활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에게는 부활이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이 부활 미사에서 우리는 서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여러분이 축하한 그 부활은 어떤 부활입니까?
2천 년 전 부활의 사건을 축하하는 것입니까?
과거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축하하는 것입니까?
사실 그것은 2천 년 전 사람들,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따랐던 이들에게 축하할 일이지 왜 우리끼리 축하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죽고 나서 내세의 세상에서의 부활을 축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내세의 일을 벌써 축하합니까?
우리는 우리와 관계없는 곳에 부활을 두고서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천사들도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죽음에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저 멀리의 과거, 혹은 우리의 죽음 이후에서 주님을 찾습니다.
그 미래를 위해 지금 선행을 하며 덕행을 쌓고 정성을 쌓고 있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닙니다.
하늘의 보화는 우리가 선행을 얼마나 했고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죽음을 위해 우리는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인간은 죽음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1독서에서는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지창조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유형무형한 창조를 일으키십니다.
인간은 그러한 하느님의 모상에서 태어난 이들입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원 순수함으로서 하느님과 같이 창조해낼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생명 그 자체로부터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지만 인간 그 자체로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창조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게 됩니다.
동시에 다른 피조물들과 만나면서 원 고독을 느꼈습니다.
다르다는 것을 인지했고 자신을 발견해나갔죠.
자신을 알 수 있으니 자신의 고유성으로서 하느님과도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여자를 만남으로서 서로를 인식하여 남자와 여자라 불립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원 순수함을 지닌 상태로 살아갑니다.
구약에서 카인부터 해서 모든 민족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관계를 맺습니다.
그 하느님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모습이 이루어지기에
하느님께서도 계약을 중시하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서 죄가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봤습니다.
그 고해성사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길을 여러분이 따라갔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는 어디서부터 옵니까?
단순히 계명을 어긴 것입니까?
말을 잘 못한 것입니까?
잘못된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까?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까?
여기서 좀 더 나아가야합니다.
그 근본에는 하느님을 잊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무슨 부활을 축하하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과거의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은 하느님과 나는 관계없는 이로 보는 것입니다.
또 죽음 이후의 부활을 바라봄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저 멀리의 미래의 나에게 떠넘기는 것이죠.
그렇다면 죄의 본질적인 회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는 나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그 회복의 과정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홍해바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완고함을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끊고서 나의 세계를 살아가던 자신'을 씻겨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자신을 하느님께로 회개하여 넘어옵니다.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회개를 거부하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완고함 때문에
정확히는 인간은 자신의 가죽옷이 나의 것이라고 외치는 완고함 때문에
회개를 거부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거부합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은 나를 부정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을 비우는 길이라고 표현한 것을 이야기하며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처음의 인간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느님의 관계로 하느님의 원 계획에 초대되었던 인간,
자신의 있는 자체로 다름을 보며 원 고독을 느끼며 자신의 온전한 고유성을 갖던 인간,
또 타인을 가죽옷이 아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원 순수함을 지닌 인간,
그 한 처음의 인간의 본성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당신의 계약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하십니다.
완고한 우리와 마주하십니다.
하느님과 완고한 인간이 마주한 것 자체로 인간의 것은 혼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따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것이 아닌 것을 흔들어 놓으십니다.
그것이 인간에게는 멸망과 같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약을 이행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위해 인간의 완고함과 마주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
하느님을 통해 가죽옷의 멸망을 겪은 이는 새로운 창조를 받습니다.
가죽옷을 살리기 위해 수없이 모든 것을 바쳤던 것이 멈춰지고
인간 자신으로부터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죽옷의 삶에 너무나 익숙하여 잊었던 아예 모르던 나라를 향하여 인간은 나아가고
그 나라는 인간을 향해 옵니다.
인간 그 자체로의 계획을 따라 살고, 그 자체로 자신을 갖고서
가죽옷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서 삶을 살아가며 헛된 것에 투자하는 것이 아닌
나의 모든 것을 우리의 본래 본질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를 통해 인간은 무에서 유로 창조하는 이로 거듭나며
더 나아가 다스리는 이로 발전하게 되며
마침내 하느님과 비슷한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완성을 이룹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보라, 내가 그를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민족들의 지배자와 명령자로 만들었다.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르고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너에게 달려오리니
주 너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신 까닭이다.
하지만 우리의 가죽옷을 벗는 것이 참으로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죽옷에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것을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두고서
그것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서
하느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해야합니다.
인간의 인지로서는 추상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그 하느님을 향해야합니다.
초월적인 그 가치가 인간으로서 온전히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
언제나 나의 것에 확신 갖지 말고가 아닌 하느님의 것을 향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자기 비움의 연속으로 하느님을 향하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야곱아, 돌아서서 슬기를 붙잡고 그 슬기의 불빛을 향하여 나아가라.
네 영광을 남에게 넘겨주지 말고 네 특권을 다른 민족에게 넘겨주지 마라.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만을 붙잡고 나아가야합니다.
많은 이들이 처음에는 하느님을 따르다가 자신의 기억, 지성, 의지에 메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대한 기억을 갖고
그것을 나의 지성으로 이해하여 그것만을 붙잡고 가려는 의지에 메입니다.
내가 받은 은총이 전부라 생각하고 그런 것과 같이 행동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내가 인지한 은총으로만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신이 인지한 것은 참으로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외에도 참으로 많은 것을 주십니다.
내가 크게 보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작은 것을 통해서도 주십니다.
나의 기억 지성 의지에 속지 마십시오.
나의 기억 지성 의지가 끊어졌을 때 우리의 구원도 끊어진 것입니까?
하느님의 섭리가 그 정도로 끊어질 나약한 섭리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완성을 위하여 은총을 베푸십니다.
돌은 부서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살은 살아가면서 세포단위로 수많은 멸망과 창조를 더해갑니다.
그러나 생명은 이어집니다. 이것을 깨닫고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되어야합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의 영혼이 멸망과 창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느님만을 찾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부정했던 것을 통해서도 하느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 안에서도 죽음이 아닌 부활을 보듯
우리가 원죄, 즉 우리가 가른 선과 악으로 짓밟힌 악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바라볼 때는 좋은 것에는 좋은 것이 보이고 나쁜 것에는 나쁜 것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통해 바라볼 때는
좋은 것에서 하느님의 것을 보고 나쁜 것에도 하느님의 것을 봅니다.
인간에 의해 더럽혀진 하느님의 이름이 다시 되살아납니다.
사실 본래 살아있었지만 인간이 더 크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민족들 사이에서 더럽혀진,
곧 너희가 그들 사이에서 더럽힌 내 큰 이름의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너희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멸망과 창조가 크고 작게 계속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만나도 우리의 사상이 무너질지언정
우리가 중요시하는 무언가가 무너질지언정
나의 생명과 나와 하느님의 관계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너질지라도 더 단단하게 새롭게 창조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해 커다란 멸망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부활로서 그 존재를 이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부활을 통해서 멸망치 않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형제 여러분 다시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이 말의 뜻을 되돌아보십시오.
나는 부활을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나의 부활은 어디에 있는지 되돌아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내가 부활해야 부활이 의미가 있고
모든 이의 구원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죽음 안에서 돌과 같이 굳은 마음에서 일어나 멸망 너머의 창조를 바라보십시오.
그 창조를 향해 나아가십시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우리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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