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2019.4.9
제1독서 <물린 자는 누구든지 구리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 민수기 21,4-9
복음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 요한 8,21-30
뱀으로 고통받아 뱀을 통해 치유받는다.
오늘 독서를 바라보면 참 기묘한 일이 일어납니다.
뱀으로 고통 받은 백성들이 뱀을 통해서 나아지고 뱀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집트 10가지 재앙 때부터 하느님께서 무언가 보내시면
그것을 치워버리셨다는 이야기를 합니다만 오늘 뱀은 와서 함께 있지만
동시에 구리 뱀을 통한 구원을 받습니다.
저는 저 뱀이 참으로 인간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도 니코데모의 대화에서
불 뱀과 사람의 아들을 동일시하는 비유를 하신 것을 통해서 말이죠.
인간들은 인간을 통해서 타락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통해서 하느님을 깨달아가기도 합니다.
그 깨달음은 인간으로 인한 고통까지 모두 아물게 하죠.
왜냐하면 인간을 깨달았으니 그 고통도 함께 동반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불 뱀으로 난 상처가 들어 올려진 불 뱀을 통해서 치유되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볼 수 있습니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시어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합니다.
그 안에는 그 아픔을 무시하기 위해 예수님을 미친 자로 취급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인간의 기준으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인간의 기준으로서 그는 나의 나약함을 드러내서 아프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입장에서 사람의 아들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나의 풍성함과 나약함을 명확하게 아시어
나의 나약함을 채워줌으로서 완성시키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위로부터 받아들인 이들은 아래로부터 상처를 입었어도 치유되며 완성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현대시대에 와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수많은 아픔이 전달됩니다.
인간의 몸을 숭배한다면서 영을 무시하면서
하느님의 관계는 당연히 뒷전이고
인간을 단순히 생물학적, 물리학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몸이 물질이라는 것을 통해 사물처럼 여기고 그것을 상품화합니다.
상품화되었으니 인간은 도구일 따름입니다.
사회도 제시된 기준에서 미달되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제시된 기준에서 미달되면 사회의 장애물 한 개인의 장애물일 뿐입니다.
일을 잘 못하는 사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 성적이 낮은 사람,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 지적 사고를 못하는 사람 등
그 무엇보다 모든 인간들의 성장의 기초인 배아나 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가치한 것들은 낙태를 하듯이 조용한 살인으로 묻히는 세상입니다.
또 상품화로서 성매매나 장기매매 나 정자나 자궁을 대여하는 등
새로운 인신매매도 팽창하죠.
자신의 가치를 높게 여길 수 있을 때는
그저 쾌락을 느낄 때, 인간의 기준이란 것에 도달해 있을 때뿐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은 그저 물질입니다.
제 가치를 해야 하는 도구일 뿐이죠.
인간은 사랑을 통해서 그 가치가 드러나는 존재이지만
그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서 도구가 되어야하는 세상이죠.
이 사회에서 인간의 몸은 수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죽어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몸을 통해서 이렇게 죽어가는 세상이
다시금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게 됩니다.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한 처음에 인간은 교류를 통해 자신은 다른 피조물과 다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다른 인간을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서 인간이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인간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남성성과 여성성이 드러났고
그것들이 존엄하게 다루어졌고 서로 부끄러움 없이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본 자체로 서로가 하느님의 영을 받은 동일한 인간이며
각각 다른 개인이며 인격체이며
이성적 존재라는 것을 알고 존엄성을 지닌 것을 깨달았죠.
한 처음에는 인간의 존엄이 순수함 속에서 바라볼 수 있었고
그 관계 안에서 인간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내어주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과도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몸으로 상처 입은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바라본 몸을 통해 다시금 회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아래의 기준에서 개를 정의한다면 개는 짖기 때문에 개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정의한다면 개이기 때문에 짖는 것입니다.
아래의 기준에서 인간을 정의한다면 인간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인간입니다.
인간은 공감을 할 수 있어야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야 인간입니다.
인간은 사회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 있어야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나타낼 수 있어야 인간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바라보면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며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으며
사회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자신을 인간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준에서 미달되면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닌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인간이든 그 자체로 존엄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있는 나”를 통해서 창조된 “있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형제 여러분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시오.
“있는 나”께서 창조하신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십시오.
그것을 통해 여러분이 지닌 인간의 기준이 무너지며 동시에 치유되며 완성될 것입니다.
알몸을 보고서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그 때 온전한 순수함으로
인간 자체를 서로가 받아들였던 원계획에 참여하십시오.
인간을 통해 받은 여러분이 받고 있는 상처,
형제들이 받고 있는 상처,
공동체가 겪는 상처,
세상이 겪고 있는 상처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통해서 치유될 것입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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