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 제4주간 토요일]
<하느님은 나의 방패, 마음 바른 이들을 구하시는 분>
2019.4.6
제1독서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 예레미야서 11,18-20
복음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 요한 7,40-53
하느님의 이름으로 대립하는 자가 많아도 하느님께서는 대립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문득 화답송의 시편의 한 부분에 눈이 갔습니다.
하느님은 나의 방패
하느님에 대한 호칭을 많이 듣고 방패라는 이야기는 자주 나오지만
하느님께서 검이라는 이야기는 사실 들은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방패는 전쟁무기로서 검과 함께 다니는 존재이나
하느님의 명칭에는 방패만 있을 뿐 검은 있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시작으로 인간들이 참으로 긴 기간 동안 크나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수없이 대립해 왔지만 하느님께서는 대립하신 적이 없습니다.
대립의 근본 원인은 내 편 네 편이라며 갈라진 현실에 있겠죠.
그 갈라진 이유는 인간의 원죄인 기준, 선악을 가르는 기준에 있죠.
수많은 대립은 인간에 의해서 생긴 것이지 하느님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의 대립 욕구에 대한 방패 역할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의인이 악인들의 악의를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단순히 순진한 이유는 아닙니다.
의인들은 적대하고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에 대해서 경계 태세를 지니지 않을 뿐이죠.
의인은 악은 인지하고 있지만 타인은 경계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오랜 기간 동안 하느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가르고 대립해 왔습니다.
중세시대에서 거의 프랑스 혁명시기에 이르기까지 육을 천시하는 태도가 대표적이죠.
정반대로 인간의 것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을 배척하는 태도도 나타나면서
크게는 두 그룹이 대립해옵니다.
하느님의 백성들과 인간들의 대립으로 여겨졌죠.
그러나 그저 인간의 싸움이었습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인 의인들은 검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대립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말이죠.
하느님의 이름으로 검을 들고 편태를 들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만
하느님께서 흙으로 빚어 만드신 육과 불어넣으신 영을 보시며 완전한 결합이 되었던 영육을
함께 보시며 “보시니 좋았다.” 했던 사실을 잊고서 대립에만 집중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대립하려는 세력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성전 경비병들은 증언합니다.
예수님께 이들을 적대하고자 하는 모습이 없다는 것을 말이죠.
이들이 흔히 일컬어지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대립하는 태도를 내려놓고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죠.
이스라엘을 찾아갔던 예언자들도 마찬가지로
그저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것 말고 대립한 것은 없습니다.
예언자들도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지금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할 뿐이죠.
성전 경비병들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숨은 제자인 니코데모는 요한복음 초반에
예수님의 뜻을 이해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칭해집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의 뜻을 잘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숨은 제자로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하죠.
여러분도 알다시피 니코데모는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나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예수님을 적대하며 전쟁을 준비하며 모함하고 있지만
니코데모는 그들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변호하면서 그들과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려는 행동을 중립적으로 올바르게 잡아주려 하죠.
이스라엘을 찾아간 예언자들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올바르게 하느님께 나아갈 방법을 알려줍니다.
니코데모도 그렇게 올바르게 지켜나갈 방법을 알려줍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나와 반대된 이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이도 적대시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적대시하는 마음에 율법조차 버립니다.
바리사이와 최고 의회 의원을 무기로 삼지만
바리사이와 최고 의회 의원(니코데모)도 가볍게 적대시해버리죠.
그들은 대립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고 율법을 이용했을 뿐
하느님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율법이 불편한 것이 되자 율법을 버리고 성경을 가져옵니다.
그저 나와 다른 이가 누구인가 나와 반대되는 이가 누구인가 찾을 뿐이었고
그런 이가 없어야 편안히 지낼 뿐이었죠.
나와 적대되는 것에 검을 한 번 씩 휘둘러야 그들은 편해집니다.
그것으로 자신 안에서 오류와 모순이 생겨도 말이죠.
그들은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모든 것
“예수님”,“군중”,“성전 경비병”, “바리사이”,“최고 의회 의원”,“니코데모”,“율법”에게
한 번씩 검을 휘두르고서야 편안히 집으로 돌아갑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그들은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미사를 기억하십시오.
봉헌 때 단순히 헌금 내는 것으로 진행되었기에 잊고 있을 수 있지만
원래는 신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가져와서 봉헌하고
사제는 그것을 성찬 전례를 통해 성변화시키며 예수님의 몸과 피로 나누어 줍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겉모습만 보는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변한 것이 없는데 무엇이 변한 것이냐?
우리는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한 것이라 믿지만
겉모습이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받으시고
우리의 것을 당신의 것으로 바꾸시어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미사때에 영성체를 통하여
우리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방패이십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과 모든 섭리를 보호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대립은 없습니다.
하느님을 통해 모든 것을 살아가는 사람과
자신의 것을 통해 모든 것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의 것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이 수많은 것을 적대시할지라도
하느님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이들까지 초대할 뿐입니다.
그들의 것은 대립할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통해 완덕에 이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여러분 대립하는 이들로 인해 내가 상처받아서 나 또한 대립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통해 살아가는 여러분 !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인 방패라는 의미 그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모든 것을 지켜주십니다.
그들과 대적하지 말고 초대하십시오.
하느님의 모든 행동은 초대의 길이며 사랑의 창조의 길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