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2019.4.4
제1독서 <주님,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 탈출기 32,7-14
복음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 온 모세이다.>
✠ 요한 5,31-47
누구든 소통하지 않은 이의 잘못입니다.
사회의 대부분의 구조를 바라보면
큰 집단 하나 안에 중간 크기의 단체들이 뭉쳐져 있고
중간크기의 단체들 안에 작은 크기의 단체들이 모여 있고
작은 크기의 단체 안에 더 작은 단체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모습이 가장 큰 모습이 지구촌이라는 큰 모습이고
가장 작은 모습이 개인이라는 한 사람의 모습일 것입니다.
이 모습은 큰 것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기에 포함된 동시에
자신만의 울타리를 지니며 자신의 것을 지니며 살아가죠.
그런데 이 관계가 서로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큰 것이 자신의 것을 강조함으로서 작은 것들은 종속이 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정 반대로 작은 것들이 자신의 것을 강조하면 큰 것을 무시하여
포함된 동시에 완전히 독립된 형태로 모순적인 형태로 살아갑니다.
작은 것들이 큰 것과 포함되어 살아가는 동시에
자신의 것을 유지할 수 있는 그 요소는 바로 소통입니다.
큰 것의 의미도 이루어주며 동시에 작은 것 개개인의 뜻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이 무너짐으로서 서로간의 문제가 생깁니다.
큰 것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작은이들로 하여금 억압과 종속이 됩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뜻일지라도 마찬가지죠.
오늘 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정의에 맞는 행동을 하시려 합니다.
대신의 그 안의 포함된 작은 모든 이들이 묻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이를 해결한 것은 바로 소통이었습니다.
소통을 통해서 작은이들을 보호하면서 하느님의 크신 뜻이 이루어지게 했습니다.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우리는 낮은 이로서 자주 지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가 낮은 이로서 만나기 때문에 낮은 이로서의 입장만을 봅니다.
큰 이들이 소통 없이 자기주장이 강하게 하면
낮은 이들의 개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참으로 잘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역의 상황이 더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억압은 큰 이들이 작은이들에게 행하는 것이기에
역으로 그런 상황이 있을 리 없다고 하지만
보통의 인간과 인간 사이에 또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역의 상황이 더 많습니다.
교회와 신자들 사이에서도 역의 상황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명확하게 지적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큰 것 안에 포함된 작은이들이 소통을 거부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울타리를 굳건히 하고서 소통을 거부하죠.
그렇게 되면 역으로 큰 것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만약 큰 것이 A란 것을 방향을 잡고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런데 작은이들이 B라는 것을 잡고서 소통 없이 그리 갑니다.
마찬가지로 소통이 없이 진행될 때 작은이들로 인해
큰 것이 진행하고자 한 A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죠.
큰 것은 작은이들을 포함하고 있기에 큰 것이 진행하는 A는 작은 이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죠.
오늘 복음에 유대인들은 요한의 증언을 받아들이고,
또 모세의 증언을 받아들이며 성경도 받아들입니다.
심지어 연구까지 하며 받아들이죠.
그러나 아버지 이름으로 오신 예수님의 증언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까 교회와 신자 사이에서 역의 상황
작은이들이 소통 없이 고집을 부려 큰 것이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했습니다.
자기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주는 신부님 말씀은 잘 따르면서
교회의 뜻은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주의가 팽배한 오늘날 내가 믿을만한 교리만 골라 믿고
몇 개는 안 믿는 경우로 가는 경우도 많죠.
작은 개인의 울타리가 소통을 끊어버림으로서
개인에서 더 나아가 작은 공동체가 울타리를 튼튼히 해 큰 것과의 소통을 끊었을 때,
분열이 시작되고 모든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소통을 끊었지만 이미 그러한 구조 안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단체 교회까지 무너졌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안에 살아간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소통이 무너지면 이 관계도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이죠.
그렇기에 하느님께서는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소통의 모습도 보여주심으로서 조화를 이루며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이러한 소통의 단절이 자신의 뜻을 지켜주고 더 키워줄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자신이 세운 울타리가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분열에 대한 논의가 벌어질 때 이를 고발하는 것은 소통의 단절입니다.
심판 때에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
자신의 좋다는 그 뜻이 한 순간에 무너집니다.
자신만의 울타리를 세우고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은 자,
교회와의 소통의 노력을 하지 않은 자,
하느님과 통교를 이루려 노력하지 않은 자,
큰 이든 작은이든 소통의 단절이 그를 심판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굽히신 것을 묵상하십시오.
하느님조차 소통이 단절 될 때
그 공동체 안에서 이루려던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이 아무리 좋아도 이를 소통을 위해 내려놓으십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과 통교 하십시오.
이웃과 소통하십시오.
그것이 자신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는 모두가 살아나며 완덕에 이르는 길입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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