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주님의 교회는 하나의 빛>
2018.6.25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신명기 30,1-5
제2독서 <서로 용서하십시오.> ▥ 에페소서 4,29-5,2
복음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 18,19ㄴ-22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죄악은 하느님의 원수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냥 걸어 다니는 평범한 사람을 말이죠.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특별한 특징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보통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지나가는 행인A는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떠한 문제가 없죠.
그런데 만일 그 지나가는 행인 A가 칼을 들고 걸어온다면 어떨까요?
그 경우에는 문제가 있을 겁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한 가지 다른 점이 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이 칼을 들고서 여러분 앞에 서있을 때 그 사람이 문제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칼이 문제일까요?
그 사람이 들고 있는 칼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칼 자체는 그 누가 들고 있지 않으면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들고 있으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비유를 댄 것은 죄와 사람을 구분시키기 위함입니다.
지나가는 행인은 사람이고 칼은 죄악입니다.
죄악은 그 누군가가 쥐고 있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죄악을 쥐고 있는 사람은 문제가 되지요.
그 죄악을 쥐고 있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자 이 상처를 입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해야 할 것은 심판과 자비입니다.
자비는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조금 거북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부터 복음까지 용서를 이야기하는데 어디서 심판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물을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 심판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즉 용서의 전제 조건이지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심판과 판결에는 자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심판과 판결에는 죄악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도 같은 권고를 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죄에 대한 책임과 대가는 명확하게 받는 것이 심판이며
그가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는 징벌을 내리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문제 있는 이와 똑같이 칼을 들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죄를 내려놓고 회개한 이에게 칼을 휘둘러야 직성이 풀리고 안전해졌다고 여깁니다.
가해자의 인권이 판결을 건드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전과자가 되면 인생이 망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례이니까요.
이 정보화 사회에서 전과자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판결 받는 것 자체를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합니다.
만약에 판결을 받으면 전과자들은 결국 칼을 쥐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칼을 내려놓아도 칼을 든 사람으로 여기고서 자신에게 위협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죄악이 평생 서로 칼을 들게 만드는 상황으로 이끌어 갑니다.
칼을 든 사람을 죽여야 안전한 것이다 라는 논리는
사람을 해치는 짐승은 죽여야 한다 라는 논리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사람을 해치는 짐승은 죽이는 것이 가장 합당하고 효율적이며 뒷감당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죽인다고 위협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점은
짐승은 관계와 친분이라는 것이 희미하지만 사람은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점으로
당장 내 앞에 칼을 든 저 사람을 죽여야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점은
그 사람에게 상처 입히면 그와 관계된 모든 이들의 칼이
당신을 향한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당신도 칼은 든 사람일 뿐입니다.
누가 시작했던 상관없습니다.
서로 칼을 휘두르는 난장판 속에 칼을 누가 휘둘렀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찌됐든 모두가 칼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칼을 내려놓고
칼을 휘두른 책임을 지고자 하는 이에게
진정으로 회개하려 하는 이에게
칼을 휘두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비이며 죄악의 적입니다.
죄악은 서로를 대치하게 하지만 자비는 서로가 함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함께하기 위한 자비를 위해 용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저는 오늘 6.25.를 맞이해서 6.25 노래라는 것이 있다 들어서 찾아보았습니다.
1.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후렴)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2.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갚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우리는 이 노래를 부릅시다.
그러나 저들이 칼을 들고 휘둘렀으니
우리도 원수를 본받아 똑같은 사람이 되자 라는 식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우리의 원수는 죄악이며 사람을 해치려고 든 칼입니다.
그 죄악을 몰아내고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르십시오.
폭력을 내려놓고 비폭력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르십시오.
칼을 들고 대치하는 마음이 아닌 옆에서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르십시오.
죄악으로 억압되었던 과거를 기억하고
그러한 죄악을 몰아낼 것을 다짐하며
죄악에 휘둘리는 날이 다시 오지 않게 하자고 다짐하며 부르십시오.
우리는 총칼을 들고서 우리를 위협한 저들을,
우리 사이를 불안하게 만들려고 중상모략한 저들을,
수많은 사람들을 억압한 저들을,
우리의 안전을 위협한 저들을
빨갱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을 향해 총칼을 들자고 주장하는 당신,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들 사이를 이간질하자 주장하는 당신,
평화를 외치는 이를 억압하는 당신,
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신도
마찬가지로 같은 빨갱이입니다.
저는 좀 과격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는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성도들에게 이것을 바랬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한 죄악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것을 쥐고 있다면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배격하실 것입니다.
죄악은 하느님께 포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느님께 포함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원수로 삼고 계십니까? 죄악입니까? 사람입니까?
여러분이 원수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이 둘 중 하나 밖에 없습니다.
죄악을 미워하면 자비를 베풀 것이고 사람을 미워하면 죄악에 동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이는 하느님도 미워합니다.
하느님은 죄악을 미워하시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원수로 삼고 계십니까?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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