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2018.6.23
제1독서 <너희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즈카르야를 살해하였다(마태 23,35 참조).>
▥ 역대기 하권 24,17-25
복음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 마태오6,24-34
양심은 오늘의 규칙이며 오늘은 하느님의 날입니다.
성공의 이유에 대해 보통 이야기한다면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것은 성실입니다.
열심히 무언가를 한 사람이 성공한다고 하죠.
그렇다면 불성실한 사람의 성공은 어떻게 보십니까?
보통은 운이 좋았다, 무언가 꼼수를 썼다, 천재다 라고 하면서
상당히 표준적이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는 성실한 사람의 성공이 비표준적인 것입니다.
그저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의 성공은 상당히 보장받기 힘듭니다.
현실에서도 이런 얘기 많이 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했지만 실패를 거듭하여 절망에 빠지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상에서는 흔치 않은 이야기이지만
현실에서는 흔치 않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뭐든 열심히 하는 사람의 성공을 운이 좋았다고 보는 편입니다.
사실 성실한 사람이든 불성실한 사람이든 성공이 확정되어 있는 사람은
규칙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규칙을 명확하게 알고 규칙에 익숙해지며 규칙 안에서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공합니다.
어떤 공동체에서든지 그 공동체의 규칙 안에서 자유를 느낀다면
그 안에서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규칙이라고 이야기하니 법이나 규정 등의 적혀있는 규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보시는데
그것을 포함하여 암묵적인 규칙까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적혀있는 규정만 지키는 사람은
규칙 안에서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보통은 그 자리에 계속 있게 됩니다.
운이 좋아서 윗사람이 정말 규칙을 잘 지키네 라는 생각이 들어
높이 들어 올려주는 것이 아닌 이상
그저 규정에 적힌 듯이 올라가지만 암묵적인 규칙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이러한 규칙은 모든 사람에게 성격이 있듯이 공동체의 성격을 나타냅니다.
불성실한 사람도 이러한 규칙 안에서
필요한 일만 하기에 불성실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 필요한 일이 드러나는 일이면 성실한 것이고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면 불성실한 거죠.
어쨌든 필요한 것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가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는데 그 최선이 언제나 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성격이 모두 다르듯이 공동체의 성격도 모두 다르고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있듯이 공동체 성격이 선한 곳 악한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드러난 규칙들은 대부분 선하다고 평가됩니다. 공동체 내에서 말이죠.
객관적으로 선하다할지라도 암묵적인 규칙까지 섞이면
얘기가 달라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공동체에서 성실한 사람이 성공한다가 드러난 규칙이지만
암묵적인 규칙에서 윗사람에게 잘 보이면 성공한다고 하면
그 공동체에서 아부를 잘 떨어서 성공한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규칙들은 다른 공동체와 섞이게 되면 상생하기도 하고
관계없기도 하고, 적대가 되기도 합니다.
적대가 될 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죠.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관계를 가진 공동체의 규칙,
상대 공동체가 이 공동체의 규칙을 무시할지언정 이 공동체는 무시하지 않습니다.
많은 공동체와 상생하거나 혹은 적대하는 이 공동체의 이름은
오늘이며 규칙의 이름은 양심라고 합니다.
양심은 과거를 모릅니다.
양심은 미래를 모릅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규칙일 뿐입니다.
미래도 생각지 않고 과거도 무시하는 이 양심은 어리석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양심과의 적대에서 많은 이들이 양심의 목소리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은 그 공동체가 오늘을 기반으로 세워져 있다는 것을 잊습니다.
어떤 공동체가 어제 혹은 수천 년 전에 창설되었든지
오늘 창설이 되었고 내일 아니면 많은 미래를 건너가도 오늘을 만나게 됩니다.
단지 지금 내 기준의 과거와 미래 때문에
오늘의 규칙인 양심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즈카리야는 오늘을 선포합니다.
오늘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잘 될 수 없고 너희도 버려질 것이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요아스 임금의 오늘이 이야기 하는 그른 선택, 즈카리야를 죽이는 선택은
과거의 영광을 모독하는 즈카리야,
미래를 저주하는 즈카리야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즈카리야는 오늘을 선포했지만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과거는 지나간 오늘이고 미래는 다가올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을 강조하시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오늘을 당신의 날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쉽게 죄를 용서하시는 이유는
죄를 지은 과거가 아닌 회개하는 오늘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완성시키실 수 있는 이유는
먼 미래의 구원과 완성이 아닌 오늘 구원을 바라는 이들에게
구원하여 그 영혼을 가득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악한 공동체들이 미래와 과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오늘을 등한시합니다.
여러분께서 살아가시다 보면 오늘의 규칙과 부딪히는 날을 많이 만나셨을 것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오늘을 무시하고서 과거와 미래가 안정될 리 없습니다.
오늘을 버린 이는 과거와 미래도 버리는 이입니다.
과거와 미래의 성공이 아닌 오늘을 성공을 얻으십시오.
다시금 성공하는 이들의 공통점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규칙을 명확하게 알고
규칙에 익숙해지며
규칙 안에서 창조해 낼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공합니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https://blog.naver.com/crodei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