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2018.11.20
제1독서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을 것이다.>
▥ 요한 묵시록 3,1-6.14-22
복음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루카 19,1-10
키 작은 이 앞에 키 큰 이
오늘 자캐오를 보니 그러한 상황이 생각납니다.
어떤 콘서트나 유명한 사람을 만나러 모인 자리에서
키가 작은 이들은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합니다.
앞에 키 큰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그 사람을 만나기 힘들어집니다.
내가 평균적으로 키가 크다 하더라도 그걸 둘째 치고
내 앞에 나보다 키 큰 사람이 있다면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키가 작고 크고는 뭐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니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자캐오를 통해 바라본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있습니다.
일명 영적으로 큰 이들이 작은 이들 앞을 가로막고서
예수님을 뵙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자캐오와 같이 그 모임에서 벗어나야
예수님과 만나 뵐 수 있게 되는 경우도 많이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이야기했을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본당을 떠나야한다는
어떤 신자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어떤 모임이든 바라본다면 높은 사람일수록 중심에 있고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며 자기의 일이 많아져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높은 이일수록 말을 더 많이 하고, 계획을 잘 세워야하며,
실천을 잘 해야 하는 것이 좋은 리더 상입니다.
높은 이가 그렇게 되면 문제점은 낮은 이가 수동적이게 됩니다.
아무런 의견도 없어지며 그저 리더가 움직이는 데로 따르는
수동적인 인간이 되게 됩니다.
리더가 능동적이라면 그 모임에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리더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추가되기 때문이죠.
리더가 가는 방향이 공동체에서 옳은 일이며
모든 이들은 이를 따라야한다는 이야기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방향이고 추진력도 좋으며 일도 빠르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사르디스 교회가 그런 형태였는데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이는 리더 하나가 살아 있고 그 리더 주변에 높은 이들만 살아있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내 높은 이상으로 끌고 가다보면
다른 이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죽이고서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리를 찾고 싶고 예수님을 뵙고 싶지만
공동체의 리더가 자신의 진리를 예수님과 그 사람 사이에 가로 막아 두고 있기에
생명이 점점 끊겨 가는 것입니다.
결국 자유의지를 죽이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물론 자살은 아닙니다. 단지 일명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이 되는 것 뿐이죠.
신앙 안에서 리더의 존재는 종종 자캐오 앞의 키 큰 이들처럼
그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르디스에 이런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리더 아닌가 묻는다면 아닙니다.
이들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하느님의 사랑을 통하여 순명한 이들일 뿐
리더가 압도적으로 끌고다닌다면 보통의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포기합니다.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리더들은 이런 이들입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리더들은 이야기할 것입니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 예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 더 생각해 봐야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옳은 일 맞나?
하느님께서 보셔도 옳다고 말씀하실까?
내가 옳다고 이야기하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각자 보고 있는 곳이 다르니 느끼는 것도 다르고 판단하는 것도 다릅니다.
우리는 좁은 세상을 보고서 옳은 것을 정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보시고 옳은 것을 보십니다.
그렇기에 나한테는 옳지만 하느님께도 옳은가를 언제나 생각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옳다고 생각하시는 것을 어떻게 찾는가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죽어가는 이들을 보살피라는 말씀
자유의지가 죽어가는 이들의 자유의지를 다시 살리는 것은 경청입니다.
더 정확히는 대화입니다.
서로 대화하며 서로의 이야기에서 옳은 것을 옳다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 하며
맞추어 가다보면 공동체 안의 하느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이 옳고 그름은 단순한 이득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같이 대화를 하면
상대의 자유의지도 함께 살아납니다.
그렇게 모든 자유의지가 빛나는 가운데에서
공동체가 모두 일치되는 것이 하나가 되는 과정입니다.
리더도 내가 중심이 아닌 예수님께 중심을 내어드리며
또한 다른 사람 앞에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보이도록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눈앞을 나의 큰 신앙이 아닌 권위로 가로막는다면
오늘 자캐오와 같이 가로막혀서 신앙을 키우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 이들이 떠나서 정말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하느님을 뵙고
키 큰 이들 가운데 우뚝 서는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이 사건은 절대로 자캐오가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돌려받은 이가 받을 상급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이런 이를 질투하는 일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스스로 하느님 안에 없었다는 증표가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이들이 살아가고 다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시선을 지니고 있죠.
그것들이 사랑으로 일치됨으로서 나타나는 올바름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올바름입니다.
모든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빛낼 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도록
우리 자신부터 서로의 이야기를 사랑 안에서 듣는 시간을 가져야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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