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2018.11.6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 필리피서 2,5-11
복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루카 14,15-24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본당을 떠나야한다 얘기되는 안타까운 현실
제가 최근에 본당에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금방 냉담한다는 이야기이죠.
왜 냉담하게 되는가 물어보니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즉 미사만 나오면서 나의 신앙이 진척이 있는건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시면서
아무것도 모르겠고 뭐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서 의미가 사라져가니
자연스레 안 나오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례 받고 나서는 아무도 무엇을 해야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답니다.
실제로 어떤 신자 분은 평일미사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시더라고요.
저는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는 대부모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모가 그냥 형식적으로 해놓으니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버려진 것입니다.
뭐 오늘 할 이야기는 이 얘기가 아니라 그럼 대부모가 된 입장에서
여러분은 새롭게 세례를 받은 이 새 신자에게 어떻게 해주시겠습니까?
이에 대부분의 신자분들은 단체에 가입시켜준다는 선택을 하십니다.
그렇게 일단은 어떤 활동을 하게 만든다. 어떤 신부님도 그렇게 했다하고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절대로 활동을 먼저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단체 가입도 사실상 한 2년 정도 제한해야한다 봅니다.
과거 초대 교회처럼 세례 받는데 5년 10년 걸려서 받는 세례면 모를까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하느님을 받아들이는데 6개월이란 시간은 사실상 짧아 보이기 때문이죠.
그 요인으로 나타나는 현실 중 하나가 방금 말씀드렸듯이
관리가 없었다고 냉담자가 되는 새 신앙인들의 현실을 보게 됩니다.
세례 자체가 하느님과의 계약으로 새 시작을 하는 것인데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를 못 맺은 상태에서 세례를 받으니
그저 신입으로 취급되는 것이 최근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 세례로 신앙인이 되었다면 그 기본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어져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우리의 신앙에도 그 기본은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안 되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이 상태로 본당에서 활동을 시작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는 뒷전이 됩니다.
본당을 보면 대체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본당의 주류를 이룹니다.
여러 단체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분들이 본당에서 많이 보이고
활기차게 신앙생활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분들이 이야기하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본당을 떠나야한다고 증언합니다.
신부님 인성문제가 아니라 본당에서는 신앙을 발전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즉 활동이 중시된 나머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죠.
이것도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시간 없이 그저 하라는 데로 활동만 중시하고
열심히 하면 또 그걸 잘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복음에 나온 사람들처럼 되는겁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하느님의 초대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법은 아닙니다.
활동 중 하나인 선교는 대표적으로
하느님께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활동 중 하나이죠.
그저 지금 내가 든 단체만 열심히 살고 분쟁 없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는 아무런 생각도 안한 채
그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내 일 때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뒷전으로 두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는 이들이 분명 하느님께 먼저 초대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것이 구원되었다는 확신의 증거는 아닙니다.
부르심을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예수님께서도 경고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교회 안에 있더라도 부르심을 무시한다면 잔치상에 초대되지 못하고 버려집니다.
부르심을 무시하는 이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그저 교회 안에서의 활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결과죠.
우리의 기반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되어야합니다.
이 차이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없이 교회에 수천가지의 업적을 세운 것보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죄를 짓는 것이 더 낳습니다.
후자의 사람이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과 관계를 지낸다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그 죄를 통해 더 하느님께 나아가는 방향을 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업적을 많이 쌓았다 해도
내 활동이 중요하기에 그것은 자랑이 되고 자신의 명예가 됩니다.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 부르심을 거절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내가 지금 안정적이고 충만하다고 느끼는데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슨 상관있냐는 거죠.
신앙생활의 시작에 앞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여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활동으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자만하기 이전에
그 활동들을 떠나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이 그 활동을 이야기하지 않고
하느님과 관계를 이야기 못한다면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분이 활동을 함으로서
하느님께서 보상식으로 사랑하시는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신 것을 따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오는 영광에 하느님과 함께 나아가는 관계입니다.
신앙의 시작에 있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시작이 하느님의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가 아니라면
그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활동으로 자만하고 있는 이들 보다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이 잔치상을 채울 것입니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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