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18.06.19)
제1독서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 열왕기 상권 21,17-29
복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 5,43-48
'예'로 하는 사랑, '아니요'로 하는 사랑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중에서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말씀 중 하나로 꼽히는 말씀입니다.
그렇긴 해도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 많기에 참으로 기쁩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모습도 훌륭하지만
제가 자주 본 그 형태를 두고 생각해 보자면 사실 조금 더 노력해야합니다.
실천은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뒤 늦게 이야기하지만 제가 어떠한 모습을 보고서
훌륭하지만 더 노력해야 한다고 이야기할까요?
오늘 독서에서 나타난 아합의 모습입니다.
아합은 비록 이스라엘 역사 상 최악의 임금으로 꼽힙니다.
가장 최악으로 하느님을 배척한 임금으로 표현되죠.
그러나 오늘 아합의 모습은
제가 자주 보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신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오늘 아합의 이야기에 따르면 엘리야는 아합의 원수입니다.
엘리야가 하느님의 예언자였다라는 사실을 빼놓고 생각해본다면
아합은 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원수의 말을 듣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이었죠.
이런 아합과 비슷한 성경 인물로는 예수님 시대에
세례자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헤로데도 아합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었죠.
그냥 지나치기 쉬운 점이긴 하지만
어떠한 소설이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적이지만 훌륭하다.”라는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십시오.
그 말이 실제로 내가 말하기 쉬운 말인지 되새겨 본다면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를 본다면 조조, 제갈량, 사마의 정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원수를 그래도 있는 그대로 보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죠.
그래서 원수를 향한 증오를 내려놓거나 잠시 미루어둘 수 없다면
참으로 하기 힘든 말입니다.
이렇게 원수를 증오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고서
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원수의 행동을 본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훌륭한 자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도 칭찬하십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그러나 아합이 부족한 점은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으로서의 원수만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원수에 포함이 되지만
다른 종류의 원수는 사랑하지 못하고 식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식별하지 못했기에 사랑하지 못한 원수는 나를 타락시키는 원수입니다.
아합에게는 이제벨, 헤로데에게는 헤로디아였습니다.
사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해야 하는데
아합이나 헤로데는 예 밖에 몰랐습니다.
당장의 가족의 안정 나라의 안정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 모든 것에 예 한 것입니다.
악한 것에 대한 거부 나를 타락의 길로 이끄는 원수에게 해야할 사랑을 잊은 것입니다.
최근에 그저 모든 것에 예 하며 공동체의 안정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합니다.
인간적 관점에서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관점에서는 아직 부족합니다.
형제 여러분 자신의 주장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고서
원수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훌륭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나를 타락시키려는 원수에 대해서는
그의 이야기에 대해 아니요 라 대답하며
그와 함께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방법을 생각해야합니다.
악인이라고 원수라 하여 다시 선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인간적으로는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일 수 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상대가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 아래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예스맨이 되곤 합니다.
그 또한 훌륭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에 예 하시는 분이 아닌
그대에게 필요한 것에 따라 아니요 하시는 분입니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사실 당장의 안위 때문에 ‘예’ 만 하며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은 최악의 임금이라 불린 아합도 한 것입니다.
그대가 ‘아니요’ 를 외치지 않아 불안한 상황을 피했다면
그리스도인이 헤로데보다 잘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하지 않습니까?
‘예’를 함으로서 실천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아니요’를 함으로서 실천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든 ‘아니요’든 하느님을 위해서 하며
원수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을 향해 대답하기에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것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를 통한 사랑, ‘아니요’를 통한 사랑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함께 성찰해봅시다.
내가 예 만 하고 있지 않은지 아니요 만 하고 있지 않은지 성찰해봅시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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