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핀다>
2018.9.25
제1독서 <여러 가지 교훈>
▥ 잠언 21,1-6.10-13
복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루카 8,19-21
당신에게 사랑받을 자격,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의 이상형은 무엇인가요?
여기저기 물어보면 외모부터 해서 상대의 성격 취향 등등
세세하게 사람마다 이상형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의 사람마다 하나씩 있을 정도로 많습니다.
사람마다 각각의 이상형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이성, 내가 파트너로 삼고자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다들 하나씩은 갖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각자 이상형을 생각해둔 것이 있을지언정 그 이상형을 찾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당신의 이상형에 대해 사실상 크게 관심이 없거든요.
여러분들이 원하는 모습 호기심에 물어볼 수 있지만
진정으로 궁금해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여러분 자신에게는 필요할지언정
그걸 받아들이는 상대에게는 그의 완성에 필요한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자체를 완성시켜주시려 하십니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선교하던 이들의 역사를 바라보면
나라로 존재했던 공동체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박해가 일어났지만
부족단위로 존재했던 공동체는 반응이 달랐다고 합니다.
군인들 상대로는 전쟁이 일어났고
선교사들 상대로는 한 말씀이라도 더 듣고자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니 차이가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그 공동체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어나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가 노예였고 미개한 문명이라고 문명을 파괴하는 방식이었죠.
반면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사실 한 나라에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나라의 근심거리는
가톨릭의 사랑 뒤에 따라오는 사랑받을 자격을 외치는 이들이었습니다.
같은 백인이라고 했을지언정 와서
자신들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외치는 이들과 사랑하는 이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았습니다.
악인과 의인의 차이 수준입니다.
나한테 사랑받을 자격을 외치는 이는 오만하고 상대를 평가하는 눈으로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상대가 하나라도 그에 맞추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여 채우고 채워도 궁핍해집니다.
그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진실한 이들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저 속임수 혀로 자신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어필하며 보화를 장만하려는 이들
자신에게 보화를 뺏으려는 죽음을 찾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충만함에 의심을 품습니다.
모두 이기적이란 생각을 갖는 그는 결코 인정이 없이
상대에게 빼앗을 궁리만 하며 결코 이웃을 가엽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돕지 않는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가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사실 모든 이들은 사랑받고 싶어 하지
누군가에게 사랑 받을 자격을 듣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완성되는 길도 아니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노예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외치는 이들은
자기 마음에 맞는 노예를 원하는 것인데 누가 노예가 되고자 하겠습니까?
악인들의 개간지는 죄악일 뿐이다.
반면 사랑하는 의인은 상대를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으로 만듭니다.
사랑하는 이는 이와 같이 행동합니다.
의인은 악인의 집을 살핀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와 생각이 다른 악인일지언정
그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는지,
또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판단하였는가를 살펴봅니다.
그의 길을 존중하며 그의 길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 고민하고 그 길을 통해 한 인간이 완성되도록 함께 나아갑니다.
이는 일방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사랑으로 사랑을 깨달은 이와 함께
서로 사랑하며 서로 완성시켜주며 함께 완덕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온전한 나의 것을 완성시키려 노력하는 이에게는 충만함을 느낍니다.
그런 상대에게 사랑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느끼는 바입니다.
여기서 홀로 고립되는 이는 나에게 사랑받을 자격을 외치는 이 뿐입니다.
자신이 옳을지라도 하느님에 비하면 부족합니다.
우리가 우리 이야기가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일부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것을 찾아가야하는데
나의 것만이 옳다면 그것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의 정의는 아무리 외쳐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귀를 막았으니 다른 이도 듣지 않을 뿐입니다.
빈곤한 이의 울부짖음에 귀를 막는 자는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대답을 얻지 못한다.
제가 한 소설책에서 읽은 내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대화였는데 대략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나에게 뚜렷한 이상형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 신뢰하고 지탱해주었던 시간을 통해
너 자체가 내 이상형이 되었다.”
서로 완성되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그것이 서로의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게 되는 하나의 가족이 됩니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것,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하느님의 어머니요 형제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이상형을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랑하여 서로가 이상형이 되어주고 있습니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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