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2018.11.16
제1독서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 요한 2서 4-9
복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 17,26-37
복음 다음에 언제나 오는 새 계명 '완벽'
제가 성가대의 지휘자를 했을 때 성가연습 할 때 일이 기억납니다.
어떤 곡을 준비할 때 연습하면서 '이랬으면 좋겠다','저랬으면 좋겠다'
그런 것들을 많이 듣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괜찮으면 그 의견에 따라 성가 연습을 진행하죠.
또 따라오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교정해주기도 하면서
이런 느낌으로 하는 것이 어떨까 하며
강약 조절이나 속도 조절 같은 것들을 하며 성가를 꾸미고
어떠한 감정으로 부를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성가 연습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해왔죠.
마침내 리허설 날이 왔습니다.
제가 다른 것들이 안 되도 다 좋게 이야기하지만
리허설 날 안 되면 차갑게 화내는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
지휘를 안보는 것입니다.
어떤 아동 만화에서 농담으로 “지휘가 별거 있나 그냥 막 휘두르면 지휘지” 라고 하듯이
지휘자를 끼지 않고서 음악을 하신 분이나 음악을 듣기만 하신 분들의 경우에는
지휘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휘에는 그 노래에서의 일치해야하는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지휘자의 동작은 그저 음만 내는 것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나 감정 지휘자의 영혼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을 표현합니다.
사실 중창과 합창은 각각 개인의 완벽함보다는
그 지휘자를 통한 일치가 깊을수록 좋은 노래가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도 비슷합니다.
신앙에서의 중요한 것은 개인의 완벽함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일치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얼마나 일치해 가는가에 달려있죠.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
그렇기에 복음의 가르침도 죄를 짓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닌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복음은 무언가 새로운 족쇄가 되는 규정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되찾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표현되는 지휘인 복음 말씀을 듣고
그 사랑을 자신의 영혼에 담는 것이 신앙의 길이죠.
이 복음은 구약시절부터 있었으며 늘 강조되어왔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세기마다 이 복음을 넘어선 새로운 규칙이 생겨집니다.
죄를 짓지 않아야하는 인간이 되어야한다는 이상한 가르침이 돌기 시작합니다.
또한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의 중심은 서로 사랑하라지만
어디선가 계속해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새로운 계명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복음에 그러한 새 계명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기 마련입니다.
죄는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방아쇠 역할을 하기에
최대한 짓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죄는 짓게 됩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그 죄 또한 하느님께서 당신 섭리에 좋은 씨앗이 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죄를 멀리하는 것도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노력 안에서 행한다면 좋습니다.
성가 연습을 하면서도 지휘자의 표현에 따라가기 위해
자신들을 교정하는 노력들을 많이 하니까요.
그러나 자신의 완벽함을 보여주기 위해 교정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합창에 커다란 장애물로 다가옵니다.
잘하는 이들이 문제가 되죠.
스스로 완벽한 인간이기에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조화가 아닌 혼자 다른 목소리를 내는 분열을 가져옵니다.
마찬가지로 일치보다 스스로의 완벽을 위해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 뜻 안에서 결국 분열을 가져오게 됩니다.
자신의 완벽을 위해 끝없이 과거를 파내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삶은
하느님의 길을 걸을 때 최종적으로 문제로 다가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신의 길에서 되돌아서 그것을 꺼내 오려하지 말고
뒤를 돌아서지 말라고 이야기 했어도
누군가는 뒤를 돌아서 모든 것을 정리해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어지르는 것 하나 없도록 노력해야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죄인으로 만들면 자신이 높아지니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마귀의 가르침이자 욕망에서 나온 가르침이죠.
하느님께서는 죄악이 앞에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잘 다스리라고 가르치셨고
죄악을 통해서도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
완벽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우리에게 모이는 것도 달라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완벽함에 집중하는 곳에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의 시체와
그것을 뜯으려는 완벽하다 생각하는 독수리 같은 이들이 모여듭니다.
반면 하느님의 사랑에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비춰진 이들이 모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모였습니까?
우리가 있는 곳에 무엇이 모여 있는지 깊게 느껴집니다.
우리 안에 무엇이 모였는지 살펴봅시다.
하느님 섭리 안에서 최종적으로 불협화음을 내는 완벽한 이가 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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