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는 인간의 것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바울라 2019/03/31 22:08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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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토요일]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2019.3.30

 

제1독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  6,1-6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 18,9-14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는 인간의 것으로 좌우되지 않는다.

 

사람은 왜 높아지려 할까요?

저는 자유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런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가장 작은 요소는 관계입니다.

어떤 관계든 공동체를 이루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서로에게 득도 되는 동시에 서로에게 제약을 주게 됩니다.

우리에게 가시적으로 주어진 법도 이런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간의 지켜야할 것들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 안에서 보이는 제약은 그런 법 이상으로 서로에게 규제 사항이 늘어나죠.

한 편으로 그런 규제가 가볍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내가 상대보다 윗사람이 되었을 때죠.

사실 윗사람이 될수록 자유가 주어집니다. 아랫사람일수록 자유가 제한되죠.

그러니 아랫사람들이 자유를 원하기에 윗자리를 탐하는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저 동등한 위치일지라도 다양한 기준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비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사회 구조상 윗사람일수록 자유를 갖습니다.

이 구조는 창조 때부터 드러납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의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매여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거기서 윗자리를 받고 자유를 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를 지닌 인간도 하느님의 명령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죠.

하느님께서 온전한 자유를 지니며

그런 하느님 안에서 인간은 제한된 자유를 지니며

다른 피조물들은 특별한 자유 없이 살아갑니다.

윗자리일수록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한편으론 하느님께서도 계획한 섭리 중 하나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저 평등한 관계를 만들었으면 이런 경쟁 사회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이 구조의 숨겨진 점은 자유가 제한될수록

보호되며 수동적으로 쉽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수동적 행동에는 책임이 많이 주어지지 않죠.

반대로 윗사람은 자유로운 대신 능동적으로 선택하며 살아가야하며

그 선택에서는 온전한 책임이 주어집니다.

윗사람의 선택에 따라 공동체의 사활이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약한 이들을 위한 보호 장치로서 작용되며

서로 사랑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완덕에 이를 수 있도록 주어진 시스템이죠.

윗사람일수록 스스로 샘물이 되어 자기 안에서 뿜어져 나오도록 해야 하고

나약한 이들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이끄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는 윗사람들이 많기에 문제죠.

자유를 지녔음에도 그 자유의 샘물이 나오다가 금방 말라버리는 윗사람들이 많습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윗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윗사람이 존재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위치에 있으니 말이죠.

그렇기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바리사이의 자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야 지킬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피조물보다 더 높은 자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지위가 있어야 보장되고

돈이 있어야 보장되고

남보다 목소리가 커야 보장되고

남보다 의로워야 보장된다면

주어진 자유보다 낮은 자유를 살아가는 것이죠.

윗자리에 앉은 이들 사이에서 그런 이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 윗자리를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말이죠.

자신의 자유를 그것에 두고 그것을 잃을까봐

모든 것에 경계하며 적대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죠.

내가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것을 확인해야 자유로운 이들은 불행합니다.

그들은 자유가 보장되는 윗자리에 앉았음에도 제약 속에서 살아가니 말이죠.

사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는 크오신 하느님 안에서 보장되는 것이지

작은 인간의 지위에 보장되는 것이 아님에도 자신의 자유를 작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에는 다른 이가 없습니다.

온전히 하느님과 자신만이 담겨있죠.

스스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렇기에 세리가 더 높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형제 여러분!

 세리는 낮은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음으로서 자유를 누립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성찰하고 회개합니다.

바리사이는 다른 이를 통해 자신을 드높입니다.

사실 낮은 이들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기에 온전히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온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느 자리에 있던지 스스로 행동할 줄 알며

스스로 하느님께 향한다면 그것이 높아지는 길이며

다른 것을 통해 스스로를 높이려 한다면 그것이 낮아지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뵈러 성당에 오고 하느님과 대화를 하기 위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집” 우리의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과 만났을 때 의로워져서 돌아갑니까

아니면 자신의 기준에 더 고립 되서 돌아갑니까?

우리의 자유는 어디로부터 오는지 성찰해보는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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