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019.3.18
제1독서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습니다.>
▥ 다니엘 9,4ㄴ-10
복음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 루카 6,36-38
대립을 넘어 대화를 관둔 세대
이 세대를 무어라 표현할까요?
누군가는 다원주의 사회로 많은 것이 풍부해진 시대라 부르고
그렇게 많아진 것에 비해 철학이 사라져가는 세대라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다원주의사회는 수많은 대립과 원천이 무너진 것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과거 교회는 영이 중요하며 육은 극기해야하고 버려야한다고 생각하며
영에 속한 하느님을 높이고 육에 속한 인간을 낮추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기서 데카르트부터 인간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인간의 이야기가 점점 대두되었죠.
영만이 중요하다는 결론에서 육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가 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육을 시작으로 인간, 이성 참 다양한 것들과 싸웠지만
그 결과 이원론적인 대립이 참으로 강해졌습니다.
이원론적 대립은 냉전이라는 커다란 비극을 가져오기도 했죠.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는 비극적인 역사가 쭉 이어졌죠.
사상과 사상이 대립하고 나라와 나라가 대립하며
힘의 논리에 따라 위 아래가 갈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살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도 잊은 채 말이죠.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지킨다고 이야기하면서
심판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않으며 적그리스도라 외치며 많은 것을 적대시했습니다.
참으로 교만한 생각이죠.
대체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라는 교만한 생각은 어떻게 나타난 걸까요?
대립의 시대의 참상은 수많은 이원론적 대립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서로 대립되었던 그 사상들이 그대로 남아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의 해석에 따라 사상이 나뉘기도 하며 잊혀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죠.
사실 나는 그 사상을 따른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그 시작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정식 후계자가 없이 인터넷의 보급으로 어중이떠중이들이 많아집니다.
인터넷으로 얕게 얻은 정보로 그 사상을 따른다고 이야기하고
참으로 빈약한 사상들이 많이 돌아다닙니다.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어버린 시대인 것입니다.
모든 사상이 수많은 빈약한 사상으로 쪼개지고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모른 채 사상을 따르는 이들이 많아집니다.
그렇게 다원주의가 세상에 들어옵니다.
똑같이 흐지부지인 것, 다 똑같이 옳은 것인 걸로 결론 지어진 것이죠.
선조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소서.
어서 빨리 당신 자비를 저희에게 내리소서.
저희는 너무나 불쌍하게 되었나이다.
이원론으로 갈린 두 사상이 처음 대립할 때가 차라리 낫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되’라도 제대로 가지고 있으니 말이죠.
지금 시대는 자신의 ‘되’도 없는 시대입니다.
자신의 ‘되’가 있는지 없는지도 관심이 없고
자신의 ‘되’가 뚫려 있어도 모르는 시대입니다.
영이든 육이든, 인간중심이든 하느님 중심이든, 에로스던 필로스던
그것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의 '되'는 제대로 된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되’들이 왜곡되면서 다원주의 시대가 돌입한 것입니다.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어도 ‘되’라고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었죠.
주지도 받지도 않는 시대 그저 자신의 뚫린‘되’에 만족하며 대화를 관둔 시대입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뜻이 참으로 쉽게 펼쳐질 수 있는 시대임을 기억해야합니다.
서로 주지도 받지도 않는 이 시대 경청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대립의 시대에는 그 원 사상과 부딪혀야했기에
경청과 동시에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깊은 이해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벼운 경청으로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을 찾을 수 있고,
나약함을 파악할 수 있으며,
대립되는 것끼리 조화를 이룸으로서 나약함을 보완할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조화를 거듭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밝힐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되’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하죠.
자신의 '되'를 경청하고 그 안의 하느님의 것과 나약한 점을 파악해야
나와 대립하는 사상과의 조화도 이룰 수 있습니다.
서로 경청하십시오.
하느님의 것과 나약함을 식별하십시오.
하느님을 입으십시오.
화해하십시오.
조화를 이루십시오.
모든 대립 끝에 모든 것을 잃어가는 이 시대 하느님의 것을 되찾을 시대입니다.
주고받고 하며 우리의 '되'를 모아 하느님의 '되'가 되도록 화해의 길을 걸으십시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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