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 사랑과 필로스 사랑을 지니고 아가페 사랑을 입으십시오.

바울라님 2019-03-17 20:39 ... 조회(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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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간 목요일]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019.3.14

 

제1독서 <주님,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 에스테르기  4,17(12).17(14)-17(16).17(23)-17(25)

복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

✠ 마태오  7,7-12

 


 

에로스 사랑과 필로스 사랑을 지니고 아가페 사랑을 입으십시오.

 

신학에 관련된 공부를 하시다 보면 사랑에 대한 세 가지 분류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하나는 에로스적 사랑, 하나는 필로스적 사랑, 마지막으로 아가페적 사랑이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어떤 분류에서는 에로스는 남녀, 필로스는 우정, 아가페는 하느님이라

나누기도 합니다만 조금 현실적으로 이 분류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에로스적 사랑은 욕망에 의한 사랑으로 타인이 자신을 채워주길 바라는 사랑입니다.

필로스는 정반대로 황금률의 사랑으로 상대의 바람을 채워주는 사랑입니다.

아가페적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누구든지 완성할 수 있도록 채워주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분류를 한다면 단순히 남녀의 사랑이 에로스이며

친구의 사랑이 필로스라 할 수도 없습니다.

단순히 육적인 사랑이 에로스이며 정신적인 사랑이 필로스라 할 수도 없죠.

이러한 사랑을 보며 우리의 관계를 되돌아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이를 통해 무엇이 그른 사랑이며 수준 낮은 사랑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으뜸은 아가페적 사랑입니다만 에로스와 필로스가 없다면

아가페적 사랑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에로스 사랑과 필로스 사랑이 조화를 이루어

하느님 사랑을 입은 것이 아가페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에로스적 사랑이 안 좋은 것이고

필로스적 사랑이 그나마 나은 것이라 이야기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 하느님 섭리 안에서 역할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비판 받는 에로스적 사랑은

자신이 채워지길 바라는 욕망으로 시작되는 사랑입니다.

참으로 이기적인 사랑이죠.

그러나 이기적인 것을 다르게 이야기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로스적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의 시작점이 됩니다.

이러한 에로스 사랑을 하느님을 통해 행한다면 이렇게 변합니다.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의 주님께 이렇게 기도드렸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필로스적 사랑이 좋은 사랑이라고 표현됩니다만

이도 에로스적 사랑에 의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채워지고자 하는 것을 뒤집어서 타인을 채우고자 하는 사랑이 나온 것입니다.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자신이 채워지는 데 필요한 것을 모르며

타인을 대할 때 무엇을 채워야할지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에로스적 사랑을 통해 필로스적 사랑을 도출해 내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에로스적 사랑이 없는 채로 필로스적 사랑이 생기는 경우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없이 그저 타인에게 맞추고 하는 사랑이 나타나죠.

아까 말했듯이 채워지는데 무엇이 필요한지 모른 채로

그저 상대의 에로스 사랑에 휘둘리게 됩니다.

상대의 욕망을 채우는 데에 급급한 존재가 되죠.

오늘 복음에 나온 복음을 인용하자면

돌을 달라 하면 돌을 주고, 뱀을 달라 하면 뱀을 주며,

죽음을 달라 하면 죽음을 주는 사랑이 됩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서 두 가지 사랑의 조화와 동시에 하느님 사랑을 입혀야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돌을 달라하여도 빵을 주고자 노력하시며

뱀을 달라하여도 생선을 주고자 노력하시는 분입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에로스적 사랑과 필로스적 사랑이 조화가 됨으로서

자신을 사랑하며 스스로 채워지는데 필요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를 통해 필로스적 사랑으로 채워주어야 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생각한 최선일지라도 하느님 섭리 앞에서 최악이 되기도 합니다.

인간이 자신과 타인 관계에서 스스로 배운 것이

돌이 최선이라고 알고 있다면 서로 돌을 채워주는 관계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신 사람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완덕에 도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 사랑을 입힌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자기사랑인 에로스적 사랑을

하느님의 섭리에 스스로 참여 시키고

하느님을 향하게 하여

자신을 완덕의 이름으로서 자신을 채우는 사랑이 된다면

하느님을 통한 에로스적 사랑입니다.

타인을 채우고자 하는 이웃 사랑인 필로스적 사랑을

이웃이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하고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여 완덕에 이룰 수 있도록 채워주는 것이라면

하느님을 통한 필로스적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통한 에로스적 사랑과 필로스적 사랑이 조화가 되어야

인간 안에서 실현할 수 있는 최대의 아가페적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하느님을 통해 더 커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

 

형제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라 하셨습니다.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찾으며 무엇을 위해 문을 두드리십니까?

오늘 복음 환호송은 우리가 청하는 게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우리의 영혼에 아가페적 사랑이 가득 차도록

우리의 에로스와 필로스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깨끗하게 정화되는 시기를 가져야하겠습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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