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부활 대축일]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나타나게 하셨습니다.>
2019.4.21
제1독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 사도행전 10,34ㄱ.37ㄴ-43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 콜로새서 3,1-4
<또는>
제2독서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 코린토 1서 5,6ㄴ-8
복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 요한 20,1-9
무가치한 이를 향한 사형과 창조된 무가치한 이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현세에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기쁜 일이지만
세속에 사는 이들에게는 참으로 별일 아니게 지나갈 일입니다.
누군가는 허구로 여기며 누군가는 헛된 이야기라며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혹은 누군가는 짓밟기 위해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
부활이 죽음 이후에 있다는 점을 보며 자기들의 삶과는 관계없다고 바라봅니다.
동시에 관계없는 것은 사형시키는 요즘 세대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것들은 사형을 받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나의 삶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은 사형을 가차 없이 내립니다.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상대주의라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넘어가
주변에서 사형을 받더라도 그것이 맞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기억하셔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탄생부터 죽음까지
인간들에게 가장 가치 없고 버려져야할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미혼의 여성에게 잉태된 아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살아갔고 좋은 것이 나올 리 없는 나자렛 출신에
갈릴래아 예언자로 불렸습니다.
심지어 권위에 도전하는 반동분자였습니다.
누구의 기대도 채워주지 않는 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악으로 여겼습니다.
가치 없는 것에는 가차 없이 사형을 가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입성 때 그분을 맞이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도를 배반하여 사형을 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배반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대를 배반한 이는 그리스도였죠.
그렇기에 사형 받아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득이라도 주지 않는다면 고개라도 숙이고 다니면 그를 통해 자신을 높일 수 있으니
연민이라는 이름으로라도 그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가장 가치 없는 이었죠.
부풀리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나”인 존재를 세상을 그저 두질 못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았을 뿐
그는 “나”로서 하느님 관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형의 이유입니다.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부풀려야합니다.
나의 가죽옷을 튼튼히 입어야합니다.
가죽옷을 통해 누군가를 바라보기에
서로 비교하며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나눠야합니다.
그렇기에 기본적으로는 가죽옷을 입어야하죠.
가죽옷을 입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며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
기도를 해야 하고 선행을 수없이 해야 하며 재산을 눈에 띄게 나눠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조용히 행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느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이를 이룸으로서 하느님과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 관계가 아닌 우리의 부끄러움을 더 중시했고 가죽옷에만 더 집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그 자체로
우리는 가치 있고 존엄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명확하게 식별해야합니다.
인간적인 행위와 하느님과의 관계 무엇이 우선인지 알아야합니다.
하느님의 관계가 무조건적으로 인간이 생각하는 '선'으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안에서 완성시켜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적 행위를 우선할 때 우리는 수없이 부풀립니다.
나는 기도를 이만큼 했다, 나는 선행을 이만큼 했다, 나는 자선을 이만큼 했다.
나는 하느님체험을 이만큼 했다.
나는 공동체와 이만큼 친하다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끊어졌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도 끊어버립니다.
자신이 부풀어있지 않다는 것에 실망하여 그동안 맺었던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불안 안에서 휘둘리며 자유를 잃은채 우리의 불안을 통해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누룩을 버리고
우리의 온전한 나 자신을 마주하고
아무것도 없는 나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룩이 얼마나 부풀었는지 관계없이 그것을 위하여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제자들은 세상의 일을 보고서 그대로 믿었습니다.
즉 무가치한 이를 사형시키는 것을 바라보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무가치한 이를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키시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함으로서 이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것으로 오게 됩니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제자들과 같이 사형되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우리는 무가치한 것이 창조되는 것을 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가장 무가치했던 내가 창조되고
계속해서 창조되고 있었음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그대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이를 발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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