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Ecce Homo!

글쓴이 :  바울라님 2019-04-30 11:25:57   ... 조회수(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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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수난 성금요일]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2019.4.19

 

제1독서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 이사야서  52,13―53,12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  4,14-16; 5,7-9

 

복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요한  18,1―19,42

 


 

 

Ecce Homo!

 

“ECCE HOMO!”

 

빌라도는 외칩니다.

고난을 받아 아무런 권위도 없는 완전히 초췌한 모습의 예수님을 모시고 나와

이야기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했을 때 자, “이 사람이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예수님을 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직역했을 때 참으로 다르게 다가오는 구절입니다.

 

“보라! 사람!”

 

우리는 참으로 참혹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저 참혹한 모습이 바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

인간이 살기 위해 가죽 옷부터 재물, 권력, 재능, 지성, 공감능력 등

좋은 것으로 둘러싸 자신을 지키는 인간은 그것이 자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 모습은 우리가 참혹하다 말하는 저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저 모습으로 주님의 길을 나아갑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 합당치 못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수많은 흠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로 예수님께서는 나아가십니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

 

아무런 희망 없이 멸망에 길에 서있는 인간,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사람”의 본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가죽옷을 걸치지 않으면 상처 입는 존재가 됩니다.

가죽옷 속에 상처가 가득한 그 모습은

우리가 서로에게 지은 죄,

우리의 가죽옷을 지키기 위해

또 우리의 가죽옷이 찢겨진 것을 보복하기 위해

또 이웃의 가죽옷을 찢고 상처주었던 우리의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죄를 받아들이고 나아가십니다.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사람은 나약합니다.

자신이 지닌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받은 것을 그대로 따라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을 받을 때는 하느님의 것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른 이의 죄를 받으면 그들과 똑같이 변합니다.

나의 가죽옷에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인간의 것으로 똑같이 따라하죠.

그러다가 내 주위에 인간의 것들만이 있을 때 하느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자신의 우상을 하나 세우고 인간의 것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보여주십니다.

고난을 받더라도 하느님의 것에 매달리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음으로서 이를 인간적인 것으로 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그대로 지니신 채 나아가십니다.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하느님을 품고서 나아가는 그 길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고유성의 완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 위에서 자신의 것을 표현하시며

수많은 것으로 무장한 이들도 예수님의 고유성을 완성한 모습에 두려워합니다.

당신에게 당신에 대하여 묻는 이들에게 이미 든 것이 드러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조용히 당신을 바라보게 해주십니다.

유일하게 예수님만이 당신의 길을 조용히 당신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수석사제들은 권위와 로마를 통해 걸어가고 있었고

군중은 우상화된 메시아와 군중심리,

베드로는 생명의 위협에 휘둘렸고

빌라도는 자신의 권한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나로서 걸어가는 이는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나자렛 사람 예수요.”

“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의 모습 그대로 나아가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사람' 그 자체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법을 알고 있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대사제로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서 하느님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그 나약함 안에서도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람인 그 자체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것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나약함은 하느님과의 단절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 관계를 회복함으로서 우리는 회복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 사람은 모든 것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시 이어가는 대사제의 길을 걸어가셨고

사람으로서 자신 스스로 멸망과 마주하면서

사람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까?

사실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은 모두 우상일 뿐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잠시라도 잃는 것이 죄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완전한 사람으로 계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따라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주님의 길을 나아갑시다.

네이버 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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