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떠나 보냄으로서 만납니다.

글쓴이 :  바울라님 2019-05-30 22:52:22   ... 조회수(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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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간 목요일]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2019.5.30

 

제1독서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 사도행전 18,1-8

 

복음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 16,16-20

 


 

떠나 보냄으로서 만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늘상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안 계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혹은 기도하는데 전혀 집중이 안 되고 분심만 가득하고 끝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늘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참으로 걱정할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수난과 부활이라는 구조를 알고 있으면서

이 이야기를 듣기에 당연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교만 된 생각입니다.

또 제자들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서 바라보는 입장이기도 하고요.

비유를 하자면

자신은 피정을 가서 정해진 삶을 살아가며 기도시간이나 묵상을 깊게 하면서

밖에 바삐 살아가는 이들에게 ‘왜 기도하지 않으면서 살까 신앙이 부족한 사람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인도 피정이 끝나면 같은 삶 바쁜 삶을 살아가는데 말이죠.

제자들의 상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은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지도 몰랐습니다.

수난에 대해서는 꿈에서도 생각 못했고 부활은 더더욱 그렇죠.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떠나야하는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황에 맞춰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기도해도 영적 위로를 주지 않겠다.

너희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통하여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 정반대의 과정이 어떤 연관을 지녔는지도 모르겠고

왜 떠나시는지도 모르겠는 상황입니다.

왜 떠나시는 걸까요? 예수님 그 자체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각자의 생각이나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치유자이신 예수님 위로자이신 예수님,

우리를 위하여 수난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등등 예수님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는 마치 장님이 코끼리의 일부를 만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만일 치유자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본다면

치유자적인 면모가 사라졌을 때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제자들의 경우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그 예수님이 사라지면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선교하는데 상당히 애를 썼다고 하는데

이는 그 당시 있던 유대인의 관점과 그리스인의 관점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이런 관점으로 나뉘죠.

정치적 메시아를 원하며 예수를 배척하는 세력과

예수를 받아들이는데 양자설 즉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완벽한 삶 때문에

하느님의 양자로 채택되었다고 생각하던지 둘 중 하나였습니다.

또 그리스인들은 위대한 지혜인 로고스가

더러운 육을 취했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 육화를 거부하는 가현설을 주장했고

또 자신들과 함께하는 예수님이 아닌

그리스 로마신과 같이 인간과는 저 멀리의 존재로 여겼습니다.

바오로가 곤혹을 겪은 것은 단순히 반대자들만이 있던 것이 아닌

거짓 예언자로 분류되는 이들, 예수님을 자신의 관점에서 받아들인 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관점 안에 갇혀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 모든 태도들에 멸망을 선언합니다.

 

그들이 반대하며 모독하는 말을 퍼붓자

바오로는 옷의 먼지를 털고 나서,

“여러분의 멸망은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나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다른 민족들에게로 갑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바라보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관점을 내려놓게 하기 위해 떠나십니다.

영광을 통해서 바라보는 예수님,

수난을 통해 바라보는 예수님,

치유를 통해 바라보는 예수님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통해 바라보는 영광, 수난, 치유 로 바라보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수식하는 모든 수식어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예수님 그 자체를 통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관점 안에만 갇혀 있다면 그것은 멸망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아닌 고립되기 때문입니다.

한 처음 창조 때 이러한 고립,

사람 혼자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유일하게 좋지 않다고 바라보신 것입니다.

나의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 그 자체를 받아들이려 노력하십시오.

그것을 위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적 메마름 안에서

하느님 자체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청하십시오.

사실 영적 메마름은 하느님께서 지복직관을 향하여 초대하시는 부르심입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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