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019.5.15
제1독서 <나를 위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 사도행전 12,24―13,5ㄱ
복음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 요한 12,44-50
빛을 피하는 공허한 두려움
우리는 살다보면 실패를 합니다.
실패를 하면 실패로 인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을 마주합니다.
그 부족함을 마주하며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하며 이를 채워갑니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도 성장하며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멸망 안에서도 창조를 이루시며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성장의 과정을 거부하고 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원인은 공허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고 무너짐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공허한 두려움에 가득 빠지곤 합니다.
공허한 두려움이란 실제로는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 대해서 공허한 두려움을 지니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이 사람이 불편해 할 것이다.”,
“내가 이러한 새로운 시도를 하면 나에 대한 평가가 안 좋아질 것이다.”,
“괜히 나서면 나만 곤란해질 것이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대해서 공허한 두려움을 지니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저 녀석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 녀석은 망할 것이다.”,
“저 녀석의 공이 인정되면 나의 자리에 위협이 될 것이다.”
같은 위치에 있는 형제들 안에서 공허한 두려움을 지니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오지랖일 것이다.”,
“너무 무관심하다고 평가될 것이다.”,
“반대의견을 말하면 사이가 안 좋아질 것이다.”
공허한 두려움은 근본적으로는 멸망 안에서 창조하시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할 때 나타납니다.
이 두려움은 내 행동에 제약을 걸어버립니다.
또한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형제에게 제약을 걸어버립니다.
공허한 두려움으로 인해 나타난 행동은 다른 이들의 자유에 제약을 걸어버립니다.
결국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공허한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고립되어 서서히 멸망해갑니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지닌 두려움이 공허한 두려움인가 아닌가는
내가 그것에 직면했었는가 아닌가를 살피면 나옵니다.
정확히 직면했는지를 살펴야합니다.
공허한 두려움은 단순히 낌새를 느낀 경우에 자신이 명확하게 직면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빙산의 일각 같은 낌새나 일부가 아닌 이를 명확하게 직면하게 되면
사실이 아니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종종 신비를 체험하는 이들도 공허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내가 체험한 것을 선포하는 것이 실패하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을까?”
이 공허한 두려움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에 순명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의 말이 중요한 것처럼 외치는 사적계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공허한 두려움에 마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공허한 두려움을 식별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인내임을 오늘 독서는 보여줍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단식은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도 자기 비허를 위한 단식과 함께 기도하였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도 정말 자연스럽게도 또 다시 단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바로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니라 인내를 통해 받은 것을 명확하게 하여 실천했습니다.
이 자연스러운 흐름은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내의 시간, 조용한 응답은 많은 교부들이 강조한 사안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며 완벽만을 추구하는 성급함 안에서는
수많은 공허한 두려움을 낳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공허한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
공허한 두려움에 가득 찬 내가 움직이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를 통해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의 것을 온전히 선포할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빛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비추는 밝은 빛입니다.
그 빛을 통해 여러분의 부족함이 드러날 것입니다.
가볍게 생각하십시오.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부족함이 드러나면 채우면 되는 것이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으면 회개하여 바른 길로 나아가면 됩니다.
복잡한 사고로 공허한 두려움을 만들어내지 마십시오.
공허한 두려움으로 빛을 두려워하여 어둠 속에 숨어 사는 이가 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선으로 이끌어주실 것을 굳게 믿고 나아가십시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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