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2019.6.20
제1독서 <나는 하느님의 복음을 대가 없이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 코린토 2서 11,1-11
복음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 마태오 6,7-15
무엇이 옳은 이야기일까?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
가끔 유사종파의 설교를 보다보면 다른 분파에 대해 비판하며
저 사람들은 옳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따와서 한 마디 한 마디를 비판하는 것도 있었죠.
그런데 내가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생각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요?
이는 단순히 그들은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성찰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이 옳은 것이며, 다른 이가 선포한 예수님은 아닌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톨릭을 믿고 있다는 것은 다른 것보다 우리가 맞기에 믿는 것 아닙니까?
그 맞다는 근거는 어디서 올까요?
그걸 위해서는 예수님 말씀 자체를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 말씀은 어디서 온 걸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단순히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 합니다.
또한 바오로의 선포를 하느님께서는 아신다고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나 교회 전승의 교부들 바오로 사도도
모두 하느님을 통해서 말한다고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식별을 위해서는 결국에는 하느님의 입장까지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야 했을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를 찾아야합니다.
사실 성경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미덕이라 하는 것은 과거 율법주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 적힌 예수님 하느님께서 가시적으로만 드러난 것만 바라보고
예수님 안에서 드러내시는 하느님 자체를 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코린토 인들이 식별을 못하고 예수님 이름만 들어있다고 받아들인 것도
우리 자신도 성령을 통해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
그러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이 무엇일까요?
인간에 대한 하느님 계획이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가 있어야합니다.
구원을 이야기하더라도 구원의 원리가 무엇인지,
구원이 어떤 상태에서 어떤 상태로 넘어가는 것인지,
지금 상태는 어떻고 구원된 상태는 무엇인지
예수님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을 바라보다보면 다 나옵니다.
전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에게 계시된 모든 것이 나타납니다.
어떻게 하느님 존재만으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는지 나와 있습니다.
가톨릭에서 교회 전승이라 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행적만,
또 구약에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만,
그리고 성령의 활동이라 불리는 것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된 하느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담긴 인간의 모습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에 협력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먼저 이야기하여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자유의지도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심으로서 드러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선택을 주심으로서
인간이 자신이 자유의지를 깨닫고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 왔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다른 피조물들도 하느님께 뜻을 받았지만
유일하게 응답한 피조물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뿐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받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이 관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인지하여 우리 경험을 초월하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고
선택을 받음으로서 우리의 자유의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또 하느님께 사명을 받음으로서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느님께 받은 충만함으로 모든 창조물들의 질서를 세우고
가치와 의미를 지닌 존재로 재탄생 시키는 창조의 협력자로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응답으로 이런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원죄로 이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저버리는 원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 원죄는 모든 죄의 시초가 됩니다.
원죄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 스스로 단절시킨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인간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게 됩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인간은 충만해지고
그 충만함으로 세상을 대하고 모든 관계를 대하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하느님과 단절되면 어떻게 될까요?
존재가 사라져 갑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있기에 그것을 통해 살아가게 됩니다만
단절되어 점점 존재가치가 사라져 갑니다.
결핍된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죠.
결핍된 존재로서 하느님께 받은 일 수행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충만함으로서 다스려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더욱 충만하게 하였지만
결핍된 상태로서 세상을 다스리니 충만한 것도 결핍된 존재로서 만들었습니다.
이런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모든 교회 전승이 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세상을 다스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주님의 기도의 중심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우리의 모든 것은 구원을 넘어선 구원 후의 삶 우리 본래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계라는 특성도
하느님과 교류를 통해 사랑으로 성장한다는 것
그 사랑으로 충만해진 인간이 모든 세상을 충만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회복함으로서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입니다.
가톨릭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나와 모든 이와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일으켜 세우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하느님과의 관계에 더욱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