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행적을 보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 행적을 통해 내면을 보라

글쓴이 :  바울라님 2019-06-08 11:28:48   ... 조회수(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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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7주간 토요일]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2019.6.8

 

제1독서 <바오로는 로마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 사도행전  28,16-20.30-31

 

복음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 요한  21,20-25

 


 

행적을 보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 행적을 통해 내면을 보라

 

혹시 성무일도 제 1주간 주일 아침기도 두 번째 시편이 기억나시나요?

성무일도 1주간 주일 아침기도는 축일만 있어도

거의 대부분 1주간 주일 아침기도로 바칩니다.

그래서 성무일도를 구매하시면 따로 간지로 1주간 주일 아침기도 시편을 수록해놓습니다.

어찌 보면 1주간 주일 아침기도 시편은 성무일도를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시편이기에

저도 중학교 때 한 신부님의 권유로 성무일도를 시작했는데

한 중학교 3학년 때 되니 1주간 주일 아침기도 시편은 외우면서 했습니다.

어쨌든 말씀을 묵상하는 도중 이 두 번째 시편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그 시편 전체가 떠오른 것이 아닌 한 줄이 생각났습니다.

그 내용은 “주님의 모든 업적들아 주님을 찬미하라”입니다.

우리 인간은 계시된 하느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느님은

하느님께서 계시해주신 만큼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의 행적은 참으로 중요한 열쇠입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 행적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찬양하곤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창조하셨고 또 섭리하시기에 찬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639항 찬양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을 기리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볼 때, 또 많은 선조들이 하느님을 바라볼 때

그분의 업적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업적을 통해서 그 업적이 나오도록 하는 그 본성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자르야의 기도에서 나오는“주님의 모든 업적들아 주님을 찬미하라”라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업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하느님 그 자체를 바라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하는 하느님은 그분의 업적으로 발견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그분의 업적을 찬미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 그 자체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하느님”의 모상들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볼 때 그들의 행위를 바라보고 그 행위가 전부인 것처럼 판단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오로와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뵙고 이야기하려고 오시라고 청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희망 때문에 이렇게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바오로가 유다인과 대립한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부정한 이방인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이방인들과 함께하라고 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유대인들에게 껄끄러운 존재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행위가 아닌 본질을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종종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행동들과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내는 답은 자신 내면에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이 내면에 무엇이 있는가 그 내면이 이스라엘의 희망으로 차있던 것을

바오로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복음의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형제들 사이에 이 제자가 죽지 않으리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행적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행적을 바라보았다 할지라도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오류를 경고하듯이 명확하게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행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따라라”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를 볼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이 요한복음에서 기록된 모든 증언들을 한 행적일지라도

우리가 보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따름으로서 나온 참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이 제자가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보기 전 성찰할 때 부정한 행위를 한 것이

고백할 내용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찰을 할 때 거기서 멈추는 것은

마귀의 교묘한 유혹이며 이는 영혼에 해악을 끼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분노를 했다고 칩시다.

이때 성찰이 부정한 행위를 한 것 즉 “분노를 하였다.”로 끝난다면

나는 분노가 부정한 이유를 열심히 설명할 뿐 내가 부정한 것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분노를 심판할 뿐 자신은 분노에게 자신의 책임을 떠넘기고

진정한 성찰을 피하고서 자신은 충분히 성찰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국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다스려야하는 인간은

극기라는 이름을 덧씌워 분노를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여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부정합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함께한 하와를 심판한 인간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러한 폭행을 즐기는 이들은 주님은 미워하십니다.

 

그분의 얼은 폭행을 즐기는 자를 미워하신다.

 

확실히 설명하면서도 어려운 개념이 맞기에

최근의 이슈가 된 것으로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최근에 ‘게임중독세’에 대해 상당한 이슈를 끌었습니다.

게임이 중독적이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으니 세금을 내라는 내용입니다.

게임을 하면서 욕을 하는 아이들을 보며 게임의 해악성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보겠습니다.

게임이 욕을 하게 만드는 걸까요?

욕을 하는 사람이 게임을 하는 것일까요?

게임 하면서 욕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이 축구를 한다고 다를까요?

사실 이 이야기가 나온 근거가 WTO에서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선정했다고 하기에

중독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그들이 제시한 설문지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 게임을 하는 사람이

주체성을 잃는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체성은 무엇입니까? 다스림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바라보고 자유롭게 결정하고 책임질 능력입니다.

이 자유로움에는 감각이 치우침이 없고 온전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아이는 문제가 없지만

게임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게임만 하지 않으면 아이는 괜찮다.

이것이 참으로 좋지 않은 성찰입니다.

나의 성찰은 없이 나와 함께한 무언가를 부정한 것으로 만들고 자신을 성찰하지 않습니다.

욕한 것을 게임 탓을 하지 자기 탓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까 예시로 든 분노를 부정함으로서 모든 분노하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 율법을 받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판을 던진

모세는 부정한 사람입니까?

방금 예시로 든 게임을 부정함으로서 모든 게임하는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이것은 성찰이 아닌 원죄 때 이루어진 상황을 재현하는 것뿐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결국에는 하느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과 함께하도록 섭리하신 하느님의 잘못인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나를 신문하고 나서 사형에 처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으므로

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나는 내 민족을 고발할 뜻이 없는데도 하는 수 없이 황제에게 상소하였습니다.

 

절제 덕에 대해 왜곡해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아까 왜곡된 성찰에 대해 이야기한 바와 같이 절제 덕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제를 하는 이유는 그 대상이 악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찬란한 저 태양도 지나가는 것이라 기억한 다윗과 같이

절제와 극기는 나의 자유의지의 회복

(감정의 평정심, 온전한 앎을 위한 확신에 대한 극기로 이루어지는 경청)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식별하고 권고할 때도

그 형제의 내면의 주체성을 일으킬 방향을 목적으로 해야지

행위를 중단시키는 목적을 갖고 교정을 하면

그 형제의 자유의지는 권고하는 나로 인해 매몰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위에 대한 교정만을 강조한다면

결국 자신이 다스리지 못한 것들을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여

그것을 피한 자신은 성덕에 오른 것과 같이 여겨 당장은 회개처럼 보이지만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는 하느님의 창조목적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보지 못한 채 교만의 길로 빠지게 합니다.

우리는 내면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당신 눈으로 살피시고, 당신 눈동자로 사람들을 가려내신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포된 교리에 따라 하느님의 행적을 바라보며

그 행적을 불러일으키는 하느님 그 자체를 바라봅니다.

마찬가지로 형제를 바라보며 행적이 아닌 그 사람 내면을 바라보고

그 내면을 일으켜 세울 권고를 하십시오.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과 함께한 행적을 심판할 것이 아닌

그것을 잘못 다룬 자신의 주체성을 회개시키십시오.

자신을 성장시킬 때 자신의 주체성을 일으킬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면

자신의 모든 것이 일으켜질 것이며

그 주체성으로 온전히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자신의 신앙이 깊어질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행적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까지 바라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리니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네이버블로그 양 세마리의 잡생각들 https://blog.naver.com/crode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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