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성심 대축일]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2019.6.28
제1독서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
▥ 에제키엘 34,11-16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 로마서 5,5ㄴ-11
복음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 루카 15,3-7
목자를 아는 양떼는 목자를 따른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되찾는 비유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마다 늘 드는 생각은
잃어버린 양은 둘째 치고 나머지 양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회개할 필요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복음을 그대로 듣다보면 이상합니다. 나머지 양들은 버려졌습니다.
목자는 양들을 광야에 버려두고 한 마리 양을 찾은 뒤
그대로 광야로 가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데려다가 광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찾으러 가는 것 까진 맞지만 다른 양들을 데리러 광야로 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러다가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집으로 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하고 말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 어떤 이들인지 생각해봐야합니다.
목자가 광야로 돌아갈 필요가 없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봐야죠.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많은 이들이 잃은 양 때문에 더 많은 양을 잃어버리는
그리스도의 어리석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의인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들은 목자를 따라왔으니 말이죠.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갈 때 양을 찾는 목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목자를 따라간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여정에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했고
그 양을 찾자 그분과 함께 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자기 가축이 흩어진 양 떼 가운데에 있을 때,
목자가 그 가축을 보살피듯, 나도 내 양 떼를 보살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이 비유를 생각해보며 양들이 광야에 당연히 남아 있다는 그 상황에 대해 성찰해봅시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와 멀어진 이가 회개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 공동체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소외된 이들을 보더라도 더 혹독하게 굴곤 하죠.
그러면서 우리 공동체에 속하기 위한 수많은 조건들을 내세웁니다.
이런 조건들을 내세우는 것이 그들을 되찾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예수님처럼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적대시합니다.
우리 공동체를 무시하고 그들만의 공동체를 새로 새우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르는 것은 공동체의 지금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따르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여정 가운데
지금 양들이 서 있던 광야에 한 때 머무른 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공동체로 불러와서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인의 자리에서 구원을 향하는 길,
하느님의 집으로 향하는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자신의 공동체가 구원의 유일한 문이라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교회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이야기로 들립니까?
만일 그렇게 주장이 나온다면 그것 또한 문제입니다.
교회가 그동안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광야에서 지냈다는 이야기 밖에 안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실 때 함께 가는 공동체지
광야에 있으면서 잃어버린 양이 있는 곳은 부정한 곳이라 치부하며
그곳을 향하는 예수님을 비판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깃발은 예수님 하나이며,
교회는 예수님께서 향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무언가 이루어진 곳에서 머무는 공동체가 아닌
예수님 그 자체를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업적을 경배하고 그 업적의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그러하였습니다.
홍해를 갈라 구해준 하느님, 제 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
그러나 그 경배 가운데 언제나 이집트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입니다.
다시금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우리는 다른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향하시더라도 의로운 양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운 양들은 그분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더욱 튼튼해집니다.
예수성심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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